2017년 12월 10일, 벧후 3:3-14 : 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벧후 3:3-14)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지난 2017년 3월 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가톨릭이 32.9%, 불교가 22.1%, 개신교가 18.9%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불교는 개신교 보다 조금 더 신뢰할만하고, 가톨릭은 거의 두 배나 신뢰할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신뢰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투명한 재정사용’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가장 많습니다. 이 지적은 과거에 비해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최근 종교인 과세법이 통과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계속해서 이를 반대를 해왔으니, 시대를 읽을 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이지요.

한편 목회자들의 개선점으로 ‘윤리/도덕성’ 문제가 49.4%로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습니다. 그 다음이 목회자들의 물질 추구성향이 개선되어야 한다(12.5%), 목회자들의 사회현실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부족하다(11.2%) 등의 순이었습니다. 기타 교회성장주의, 능력과 리더십, 권위주의 등이 있습니다. 모두 종합하면 오늘날 타락한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조롱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전도해 봐야 “너나 잘 하세요~”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 입니다. 요즘 전도가 안 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 벧후3:3-4절을 보면, 단지 우리만이 아니라 베드로후서가 기록된 2세기 초 중반 초기교회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으로부터 조롱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조롱받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2세기 초 중반 초기교회가 조롱받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필립샤프의 교회사 전집을 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남녀 간에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며, 고아와 노인을 도와주고, 죄수, 병든 자, 추방당한 자들을 보살피고, 술 취함과 탐욕, 간음과, 음란, 사치를 멀리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윤리적인,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왜,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을까요? 다름 아닌 종말론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4절,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당시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윤리적으로 사는 것은 좋다! 우리도 너희의 삶이 윤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예수가 다시 온다는 헛된 약속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주만물이 예수의 재림으로 종말을 맞이하기는커녕, 여전히 세상이 처음에 생겼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이여, 예수의 재림이 있다느니 종말이 온다느니 하는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라!”

하지만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이런 조롱에도 불구하고, 종말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조롱에 대한 교회의 변증을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기자는 초기교회가 종말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먼저, 종말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기자는 5-6절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과거에도 노아의 홍수 때, 세상이 물로 심판 받은 일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불 심판 가운데 놓이게 될 것이라고 그는 경고합니다. 7절,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서 온 세상이 불 심판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불에 타서 없어진다는 게 아닙니다. 세상 그 자체 보다, 세상의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지요. 불사른다는 것도 세상이 불에 타 없어진다는 게 아니라 enlightened, 즉 밝혀진다. 다시 말해 세상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든 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온전히 다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조롱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 종말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종말이 왜 그리도 더딘 것이냐? 일찍이 종말을 외치던 사도들도 다 죽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종말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겠느냐?...” 이미 주후 2세기에 이러한 질문이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다면, 주후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이 질문은 우리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후서 기자의 유명한 답변이 있습니다. 8절,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시간처럼 신비한 것이 없습니다. 굳이 상대성이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우리의 지난 3-40년, 제게는 50여년이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을 통해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장소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빠른 비행기 안에서는 시간이 늦게 가고, 로켓 안에서는 더더욱 느리게 가고, 빛에 속도에 다다르면 시간이 아예 멈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어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도 단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시간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기로하신 예수님은 왜 속히 오시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무능 때문도 아니고, 그분이 약속을 잊어버리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9절,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자주 악용합니다. 시간이 많으면 사람들이 회개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시간이 많으면 일찍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놉니다. 설교 준비를 아무리 일찍 해도, 피치가 올라가는 시점은 항상 마지막 끝에 가서 입니다. 시간이 많으면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가 영원한 게 아닙니다. 시간은 급히 사라지기 때문에, 회개도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도둑같이 임하는 종말을 말하고 있습니다. 10절,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기서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문자 그대로 보면, 마치 거대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해서 지구가 폭발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럴 경우,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다 사라지고 산산조각 난 지구의 잔해만 우주를 떠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의 마지막 부분은 그 때에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지구가 사라졌는데 드러날 게 뭐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지구 파괴에 관한 종말의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여기서 드러나게 될 모든 ‘일’은 그동안 우리가 행해온 모든 “노력. 행위, 수고”(에르곤 : Work)를 뜻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떠나간다는 것도, 하늘이 열려서, 이전의 모든 감추어진 것이 다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드러나되 물질(스토이케이온, element), 원소 수준으로 세밀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1절에도 이 모든 것이 다 풀어헤쳐진다, 즉 하나님 불 심판 앞에 다 드러날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를 세상이 사라지고 우주가 붕괴한다는 의미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후서 기자가 11절에서 “너희가 지금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라고 묻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주가 붕괴되어 사라지는 마당에,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 날이 오기 전에 잘 먹고, 잘 놀고, 죽기 전에 세상에 못 가본 곳, 가보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기자는 우리가 마땅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우주의 붕괴를 대비하라는 게 아니라,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 곧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3-14절a,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소망하나니)”

여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종말론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차원 높은 종말론 윤리가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 종말의 때를 바라보나니”,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14-15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즉 깨끗하고 거룩하게,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즉 평화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라!” 11절에서도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 앞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2세기 초중반 당시 세상 사람들은 그토록 윤리적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토록 어리석은 종말론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바로 그 종말론 신앙에서 나온 종말론 윤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이 없으면 차원 높은 기독교 윤리도 없습니다. 이는 동시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윤리가 실종된 타락한 종교로 조롱을 받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즉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올바른 종말론 신앙이 없다는 것이지요.

12월 10일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지구가 불에 타서 붕괴되는 날이 아닙니다. 그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도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의를 따라, 그 날에 드러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즉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평강 가운데서 나타남, 즉 평화를 드러내는 삶을 오늘도 기쁘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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