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18-22를 중심으로

【김영규 교수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 안양신학대학원, 대한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역임
  •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회원
  •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회원
  •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 30:19)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사 30: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사 30: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사 30:22)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특별히 모든 성경중에서 이사야서 만큼 우리의 시야를 가장 넓게 열려주는 책은 없다.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당시대의 영적인 분위기를 계시하신 것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도 계시하신다. 그 다음에 그것에 대한 회복을 계시하셨고 더구나 아주 멀리 신약시대에까지 하나님의 계시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나 있는 그 영원한 나라에 대한 그런 계시까지 여기에 계시되어 있다.

그런 만큼 이사야서는 그 시야가 아주 넓다. 또한 과거의 출애굽시대로 소급하여서 그의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도 역시 그 요한 계시록에 이르는 모든 성경의 내용들이 이미 그 이사야서를 통해서 선포된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이런것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또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씀중에서 그 해석의 열쇠들이 몇가지 표현들이 있다. 이사야서를 읽는데 키가 되는 표현이 있다.

첫째로는 이사야 32:15을 보면 "위로부터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까지"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말에서는 "필경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이렇게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는 "위로부터 성령이 우리에게 부우실때까지" 라는 표현이다. 거기에는 그때까지 무슨일을 하신다는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표현되었다.

둘째로 이사야 9:7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행할 것이라"는 표현이 있다. 열심이라는 말이 자주 표현되어 있다. 키느아트 아도나이 즉, "여호와의 열심이라.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행할 것이라"라는 표현이 있다. 즉 그 때까지 물론 여기에 "위로부터 성령이 주어주실 때까지" 라는 말씀은 신약시대를 포함해서 마지막날의 시대를 말한다. 히브리서에 말하는 마지막 때의 이를 때까지, 영원할 때까지 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다. 그때까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쉬지 않고 이를 행할 것이라는 그런 의미이다. 

셋째로 이사야 27:8에 거기에 보면 "적당히 견책하사" 라는 말씀이 있다. 물론 이 표현은 다른 표현에서 "적당히"라는 말을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경우도 있다. 이사야 전체를 통해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적당히 견책하사"라는 표현은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어떤 모양에 있어서의 어떤 적당한 견책을 말한다.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적당한 견책이다. 사사시대로부터 그 후의 모든 열왕의 시대에 모든 것들이 적당히 견책하시는 역사라는 것이다.

넷째로 이사야 10:24에는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 때"라고 할 때, 막대기와 몽둥이는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 그 후에 교회와 함께 있었던 모든 역사, 즉 교회를 견책하는 도구들을 가리킨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시는 어떤 것으로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을 도구로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 하는 것 한 중요한 멧세지의 근본 정신이었다. 그 멧세지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인데 이런 표현뒤에는 언제든지 "칠 때" 하면서 교훈하시면서 "두려워말라" 하는 것이다.

"두려워말라." 즉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역사에 경제나 나라 간의 문제,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런 부분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을 몽둥이나 막대기로 생각할 때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이다. 교회를 섬길때도 마찬가지다. 즉 막대기와 몽둥이로서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을 가진자만이 교회를 참되게 섬길 수 있다. 이 인식을 못할 때 우리는 그 안에 머물고 그 안에 흡수되고 그 안에 따라가며 흘러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핵심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애굽을 두려워하지 말라, 앗수르를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늘 그것을 의뢰하고 의지하고 힘에 의지하고 그런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9장 여러곳에서 그런 모든 것에서도 그의 노를 거두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위로부터 성령이 우리에게 부으실 때까지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것이고, 너희에게 죄악이 있음으로 적당하게 견책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견책하시는 방식은 막대기와 몽둥이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칠때는 견책으로서 여기라는 것이다. 두려워할 자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대에 대한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 모든 역사의 내용들을 보면 그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또 그가 목적하는 바 이룰 때까지는 그 모든 것은 결코 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진노는 거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역사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사람들은 "그 시대에 진노를 다 쏟으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게 진노를 쏟으실 때는 또한 만민에게 향한 진노는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또 가장 깊은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이 요청되어서 요구되는 의의 합당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갖는 진노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분의 자신에게 그 진노를 펼 때까지는 그 열심, 그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열심을 내셔서 그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그의 영광에 참여하기 까지 역사하시는 그 열심이라는 것은 무한한 그 분의 전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분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경륜앞에서는 그 몽둥이와 막대기를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이스라엘이 패역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의 눈을 가리워 견딜수 없을 만큼 그 반역의 영적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몽둥이와 막대기를 들어 치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이 칠지라도 어지간이 그 진노를 거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몽둥이와 막대기로 때리시는 것은 적당히 견책하시는 것으로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였다. 우리 본문에 있는 것 같은 마음이 이 문맥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30:18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이사야 전체 문맥에 아주 잘 맞는 것이 이 본문이다. 그런 기다리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잃게 하시지만 이스라엘의 그 처참한 역사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잃게 하신다는 것, 그 뿌리부터 완전히 소멸하실 만큼 모든 것이 잃은 역사이다.

우리는 아직도 남북 통일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 그 뿌리채 뽑으시는 하나님의 그 경륜이랄까 견책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다. 남북은 갈라진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갈라진 정도이다. 그러나 유대땅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중심이 거기에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없이 하고 흩어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있잖는가? 이스라엘의 마지막시대에 20세기에 와서 그 땅이 무엇인가? 그러나 그때 모으셨을 때는 그분이 일한 모든 것은 다 이루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을 부르시고 여러분까지 일으키셨다. 그것이 다 통일되서 지금 하나의 교회가, 주께서 원하시는 그 나라가 이루져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을 잃게 하시지만 결국 움이 돗고 싹이 나게 하시며 처음부터 계획하신 그 의로운 나라를 이제 견고히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메시야가 임하고 주께서 임하셨다. 성육신 하셨다.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시며 그 때까지 또 아직 남아있는 영원한 나라가 이르기까지, 완성되기까지 여호와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바로 이 자체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다. 쿰란사본을 해석했던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를 했기 때문에 마지막 날을 의식을 해서 그들은 동굴 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었다. 그 본문을 잘못 해석했던 것이다. 아직도 기다리지 못해서 그분의 바른 섭리와 그 경륜을 아직도 인간이 헤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시대 이제 오늘 요한복음을 볼 것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러면 그것을 알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오늘 시대에 알았는가? 아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이 문맥에 있어서 결국 마지막 위로의 단계에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본문이 갖는 성격은 이사야 전체 주제를 잘 정리한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점은 우리에게 관심은 여기에 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물론 여기서는 "적당히 견책하사" 라는 말과 동일한 표현이다. 그러나 "고난(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결국 물과 떡을 주신다.

창세이래로 인간에게 물과 떡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창조하신 그 것이라는 것은 떡과 물을 주시는 떡과 물로서 창조하신 것이다. 배불리고자 하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떡과 물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서서 우리에게 필요한 떡과 물이 될 그것들을 미리 창조하시고 그 안에 인간을 두셨다는 것이다. 주신 것이다. 다 주신 것이다. 주신 가운데 인간을 그 안에 두셨다는 말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가지고 인간이 게을러서 손이 짧은 것을 탓하며 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앞서서 다 주셨는데 그리고 그 안에 두셨는데 왜 하나님이 손이 짧다고 그러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그 형상으로 창조하셨을 때는 우리가 배불리게 하는 그것을 구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을 너희들의 만족, 너희가 원하는 그것을 충족하는 모든 것을 준비하셔서, 그것을 넘어서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더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 그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역사속에 남겨두셨다는 것이다. 아직 창조하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는 실제 배불리게 하지 않는 것을 늘 구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다시 굶주리는 것을 구하고 다시 굶주릴 때 또한 구하고 있다. 우리가 구해야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하나님께서 더 주시고자 하는 그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변화되고 죄악된 인간의 아주 본질적인 속성인 것이다.

바울이 한마디로 마음으로 원하되 육신이 약하다고 그랬다. 즉 중생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삶과 문화는 어쩔수 없이 배불리지 못한 것을 구하게 되는 그 갈등에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오히려 그 갈등이 삶에 이어지고 오히려 문화를 창조해가고 있다. 오히려 그 갈등이 끈이 되어 다른 갈등으로 넘어 간다는 것, 그것이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잘안다. 여러분 스스로 아는 것이다. 나도 견딜수 없다 그말이다. 모든 이가 그런 길을 가는데 나만 홀로 갈 수 있겠냐 그 말이다. 그 굶주림 그 배고품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 배고픔으로 가는 것이다. 그 유혹에 가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오는 자나 말씀을 전하는자가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특별히 인간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 하나님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문제가 되었던 내용이다. 그분이 처음 공생애를 시작할 때 그 문제에 부딪치게 됐다. 즉 무엇인가? 인간이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과연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 그 해답을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 그 해답을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예언대로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고난의 채찍을 이스라엘이 맞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는가?

모든 출애굽의 사건과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사실을 사람이 진정 고백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우리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배고플 때, 내가 하고 싶은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돌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과학의 이상이 있다. 경제의 이상이 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과연 무엇으로 살아야 될 그 문제에 부딪힐 때 어디에 촛점이 있는가? 이 돌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느냐 안되느냐는 여기에 핵심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이 구별된 새로운 인간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미 모세의 시대와 그의 말을 듣는 이스라엘에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같은 문제로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 이제 나타난 것이다. 출애굽의 핵심은 이것이다. 만나를 주시고 그의 말씀을 주신 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창조때 계시하시길 원하시고 이제 그 얼마 안되서 심으신 그 역사의 핵심내용은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그 때 그 대답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알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교회가 알아야 될 것인가? 출애굽의 역사를 당한 그 이스라엘 사람이 알아야 될 것인데 그 하나님의 뜻을 누가 헤아리고있냐 그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깊고 넓으시다는 것이 바로 이 진리안에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말씀이었다. 아마 이 떡을 주시고자 오히려 우리의 일상적인 떡을 주신다 말할 수 있다. 즉 일상적인 떡을 주시는 것은 그 떡을 넘어 그 다른 떡, 우리가 이상으로 향하여 가야 할 다른 떡이다. 그 떡을 먹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의 본문은 지금 진정한 떡을 주시기 위해서, 그 다른 떡을 주기 위해서 이제 그 보다 훨씬 높은 다른 떡과 물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여기에 의미하는 바는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이다. 이것은 중요한 가르침이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떡을 주시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늘 그 역사의 모양을 이루어가신십니다.

아마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다 완성되지 않은 줄 모른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다 완성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근거가 있다. 칼빈주의는 잘 헤아리고 있다. 루터주의는 그 떡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웨슬리주의도 마찬가지다. 지금 복이 있다는 것이다.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 된다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고 고난이 있고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는 남아있는 것이다. 사람이 변화하고 주님의 주시는 완전한 부활을 입을 때까지는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떡을 주시고자 하는 그 동산에는 이미 모든 실과가 있었다는 것을 이미 여러분들이 확인하였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에덴동산의 떡으로 만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모든 참된 이상이 있다고 그런다.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꿈과 너무 비슷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더 남겨 주신 것이다.

결국 칼빈주의자들이 타락을 궁극적으로 이렇게 해석하는데는 여기에 있다. 타락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경륜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인간의 타락을 종결하지 않으셨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륜아래 있다는 것이다. 타락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이다. 즉 인간의 모든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타락, 인간이 다시 부패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열심으로 이루어가시는 일, 그 모든 역사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사탄도 죽음도 의미가 없다. 왜그런가? 하나님의 역사 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사탄도 진정한 주체가 아니고 죽음도 진정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체를 두려워하지 말라. 육체의 빼앗아 가는 그 모든 것을 두려워 하지말라. 영혼을 빼앗아가는, 영혼을 죽게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 처음부터 심어시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여 가장 복된 것, 인간이 그렇게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가야 할 그 본질에 대한 것을 조금씩 조금씩 벗겨가자는 말씀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부패에 대하여 이사야는 많은 말씀을 하신. 물론 목사들이 설교할 때는 그 부패에 관심이 많다. 너무 직선적이고 직설적이고 사회를 너무 잘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이사야가 전하고자는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부패에는 종교적 정치적 상황에 여러가지 부패가 있었다. 그러나 그 부패는 어느 사회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부패를 누가 보시느냐는 것이다. 누가 보시면서 그 부패를 지적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다른 세계에서도 부패를 지적할 수 있다. 비판이 강한 사람이 그와같이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비판과 하나님의 보시는 비판은 전혀 다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시야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보시는 것인데, 바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특권이다. 잘못을 지적해도 하나님이 지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이시는 그 특별한 시야를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보이시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그를 끝까지 사랑하는 증거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그 아브라함의 미래를 말씀하시고 거기에 열심이 이루어지는 그 뒤에는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역사가 있었던 것이었다. 즉 특별한 시야 그가 부패를 보아도 그분이 보시는 부패야 말로 사랑의 증거요 은혜의 증거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떠했는가? 그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지 못하고 종교적 형식주의에 있었던 것이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분은 너무 짐이 되었다. 견디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 진노를 쏟았다. 그러나 그 진노가 거기서 머물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럴바에야 제사보다 인애를 요구한 것이요 인간의 사랑을 요구한 것이었다. 너희가 금식하면서 나누어 싸운다는 것이다. 마음의 깊은 곳에 애통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 없으면서 금식하면서 다투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만찬하고 바로 다음에는 싸우고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서 성만찬하는 것인지…, 일요일날 축구하면서 예배를 왜 미리 보는 것인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어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에 피가 가득하면서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이 하는 것을 하나님이 도저히 견딜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 시야를 이사야에게 알려주는 것에 있다. 즉 그것을 해결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다. 그러나 단지 무엇인가?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 말씀은 어디에 핵심이 있는가? 그런 용서를 하실 만한 그분은 어디에 마음이 있는가? 즉 그분의 시야에서 도저히 견딜수 없는 그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도 지금 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는 말씀은 여러분들이 통용하는 식으로 통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시야에서 보실 때 도저히 견딜수 없는 그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다는 것이다. 왜 여러분은 남을 용서할 줄을 모른다 그 말 인가?

모르겠다. 그런 부패는 그러나 너희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러분! 그런 부패는 여러분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런 부패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가르침은 이런데 문맥이 있다. 여기에 그 핵심된 가르침에 그 폭포수같은 은혜가 있는 것이요, 그 경륜의 역사에 비밀이 있는 것이고, 그 연장으로서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오늘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오늘에도 이 멧세지는 같은 말씀으로 하신다. 신약의 말씀이 아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오늘의 말씀이 된다. 요한 계시록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계시가 아니고 이미 다 말씀하셨다. 새로운 것은 없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죄악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비틀거림은 그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게 하셨으며" (사 29:9~10)

결국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 나를 존경하나 사람의 계명을 가르침을 받을 뿐이라는 말씀 뒤에는 이 말씀이 있었다. 그들이 그들을 위해서 일만 스승을 두는 것이 그 자신으로부터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벌이다. 하나님의 견책하는 모습이다. 이미 자신 앞에, 하나님 앞에 다른 스승을 많이 둔 것은 하나님의 큰 형벌이다. 형벌인 것이다. 우리 본문을 잘 분석해보시라! 이 문맥안에서 잘 분석해 보시라!

그러면 결론이 뻔하다. 이 문맥에서 결론이 다 됐다. 즉 우리의 눈이 이미 진정한 스승을 볼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복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주신 특권이요 큰 복이다. 하나님을 그렇게 안다는 것,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안다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 그분을 통해서 아신바 된다는 내자신, 그것으로 족하다. 모든 역사는 다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앞에 스승이 숨겨져 있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 자신의 복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들을 귀가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깨달을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시고 깨달을 마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제목을 무엇이라 했는가? 바른 길과 개혁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진정한 개혁이든 무엇이든 모든것은 우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또 그럴때만그 개혁은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요, 그렇지 않는 개혁은 다 의미가 없다.

자 우리의 본문은 다 대답이 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주어졌다고 그랬다. 이 본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 본문을 간추려 놓은 것이다. 이사야 전체의 메시지의 흐름과 그것과 잘 맞추어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멧세지가 갖는 성격에 따라서 무엇을 두려워할 것을 알아야 하고 우리에게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했을 때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는 다 해답이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되겠다.

기다리시기 바란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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