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다이어그램으로 본 ‘구원’과 ‘천국’의 상호관계와 14가지 원칙들

송명덕 목사는 총신대학교 및 동 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탄에서 목회중이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칭의론 논쟁이 되는 본문에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양대 칭의론은 이 두 문제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 관점은 ‘구원탈락’으로 전통적 칭의론은 ‘거짓신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성격이 있다. 우리 모두 함께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던 ‘밭에 감춰진 보화’를 찾아보자.

(1) 밴다이어그램으로 본 ‘구원’과 ‘천국’의 상호관계

논쟁이 되는 본문의 ‘대단한 사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떠라가라’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라는 선언을 들은 신자에 대한 구원과 천국의 상호관계를 집합으로 나타내 보자.

ⓐ ‘전체집합 U’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신자+불신자’이다.

ⓑ ‘집합 A’는 이전에 불순종의 자녀였다가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신자”이다.

ⓒ ‘집합 X’는 ‘집합 A’ 즉 신자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자격이 있는 사람은 ‘집합 A’ 즉 신자이다. 불신자는 전혀 상관이 없다.

ⓓ ‘불신자’는 전체집합 U에 대한 ‘A의 여집합=’즉 전체집합 U에서 A를 제외한 부분, A의 바깥 부분이다.

ⓔ 세상 사람들은 ‘U-A’로서 죄인이며 불신자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오직 하나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이다. 이런 까닭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 신자(A)는 이전에 ‘불순종의 아들’이었으나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 산상수훈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 즉 ‘U-A=’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의를 행하는 문제’로서  전적으로 ‘신자인 A’를 대상으로 한다.

ⓖ 신자 A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불신자였을 때는 ‘행함의 문제’가 불필요했다. 그러나 ‘신자가 된 후’에 비로소 필요하다. 신자가 된 이후에 ‘죄인이었을 때’처럼 ‘의를 행함’이 필요치 않다고 간주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이것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

ⓗ 이것은 구원과 천국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놀라운 관점을 제공한다. 로마 가롤릭 이후 1500여 년 동안 ‘구원=천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관념처럼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 불신자= ‘U-A’에 있는 사람이 '집합 X'로 건너뛸 수 없다. 즉 불신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신자’ 즉 ‘U-A’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집합 A’로 가는 길, ‘신자가 되는 길’이다. 그런 후에 비로소 ‘집합 X’=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  신자인 ‘집합 A’와 ‘집합 X’의 공통점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집합 X’는 ‘집합 A’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합 X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는 반드시 ‘집합 A’(신자)이지만, ‘집합 A’(신자)는 반드시 ‘집합 X’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집합 A’(신자)에는 ‘집합 X’에 속하지 않는 신자(집합A-X)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신자’가 있기 때문이다.

‘집합 X’는 천국에 들어간다. 이것은 ‘하늘로 올라간다’ 뜻이 아니라,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때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올 때 ‘왕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재림으로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때를 ‘천년왕국’이라 부른다. 이들은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인의 즐거움’으로 묘사된 ‘천년왕국’에 왕으로 들어간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주님이 오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 안에 있었고 ‘신실했기’ 때문이다.

ⓚ 신자인 ‘집합 A’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신자 즉 ‘집합 X’에 속하지 않은 신자 즉 ‘A-X’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진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탈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에 대하여 신실치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미 믿음으로 ‘칭의/구원’을 얻은 것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것이 칭의의 불변성이다. 그러나 주님이 왕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때 즉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올 때 ‘왕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재림으로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때를 ‘천년왕국’이라 부른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의 즐거움’으로 묘사된 ‘천년왕국’에 왕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이 주님이 오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도 천년왕국 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


(2)  ‘구원’과 ‘천국’ 상호간의 14가지 원칙들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믿음의 문제’로서 ‘구원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행함의 문제’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이다. 중요한 두 주제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 주님의 말씀은 ‘전체 부정’이 아니라 ‘부분 부정’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을 제공한다. 즉 신자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천국에 들어갈 자’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다.

ⓑ 이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두 가지 시약’이 있다. 첫 번째 시약은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이며, 둘째 시약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같은 의미라 생각했다면 멸치와 참치가 같은 ‘등 푸른 생선’이기 때문에 멸치를 참치의 친척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같다.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라는 증거를 찾아보자.

ⓒ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전체부정’이 아니라 ‘부분부정’이라는 것은 양자가 모두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구원받은 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고 선언한다. 십자가 옆의 강도도 이 약속이 있기에 구원받았다.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불신자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영접한 신자이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은 ‘주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이지 ‘불신자’가 아니다.

ⓓ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들어가지 못할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행했느냐 행하지 않았느냐의 ‘유무’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의 문제는 주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비록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일지라도 ‘예수를 주여’라고 부르는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문제’는 구원받은 신자라는 신분을 의미하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관계’ 즉 ‘구원 받은 신자’가 아니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

흔히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주고받는데 이것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논제이다. 이것은 마치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걸음마를 하고 심지어 유치원에 가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불신자는 ‘중생’ 즉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 오직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듭남’ ‘구원받는 것’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  “예수를 주님(Lord)”이라 부르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동일한 문제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양대 칭의론의 각각의 결론은 ‘분별의 두 시약’이 없이 자신의 관점으로만 판단하였기 때문에 ‘오류의 곁길’로 빠졌다.
필자의 관점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구원=천국이라는 신학’은 로마 가톨릭 신학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으로 천년을 변함없이 지켜온 ‘전통이 있는 유산’일지는 몰라도 진리는 아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유사품’ or ‘짝퉁’이라고 부른다. 빛나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닌 것처럼 구원=천국 신학은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리구리한 ‘구리의 빛남’이지 ‘금의 빛남’은 아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들 조차도 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차용했다.
필자가 개혁자들을 위해 변론하자면, 그 시대의 이슈는 ‘구원/칭의’였기 때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어쨌든 오늘날까지 신학자와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감춰진 실상은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가톨릭 신학’이 만들어낸 ‘위대하고 빛나는 작품’이다. 이 사상과 신학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는 천동설’과 유사하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이성’과 ‘이론’과 ‘사상’과 신학의 ‘견고한 진’은 ‘좌우에 날선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관절과 골수, 영과 혼을 찔러 쪼개듯이 ‘구원=천국의 신학’을 쪼개어 분리시킬 수 있다.

ⓕ “예수를 주님(Lord)”이라 부르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의 생활의 과정과 목표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이다. 구원의 문제는 ‘이미’(already) 이뤄졌고 ‘단회적’이다. 그런데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특징을 갖는다.

ⓖ “예수를 주님(Lord)”이라 부르는 것은 ‘칭의 & 구원’의 문제이다. 이것을 천국의 문제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천국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관계있다. 구원과 천국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과정은 천국과 관련 된다.

ⓗ 천국에 들어가는 자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의 공통분모는 ‘주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위치이다. 이것은 천국의 말씀이 주어지는 대상은 ‘구원받은 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 주(Lord)로 부르는 사람” 가운데 있다. ‘예수를 주로 부르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천국의 말씀의 대상’은 구원받은 신자뿐이기 때문이다. 신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불신자는 ‘천국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칭의의 대상’이다.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이 주어졌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양육과 훈련과 섬김이 중요하다.

ⓚ 천국에 들어갈 대상은 “예수를 믿어 주로 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신자는 천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천국의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불신자들에게는 먼저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음이 필요하다.

ⓛ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already)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받았고 아무 문제가 없다. 또한 구원받은 후 신앙생활의 목적이 ‘없다’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아무 문제없다’라고 생각한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구원받은 후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 가운데 믿음의 성장과 성숙과 옛 사람과 자아는 죽어지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는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축복이며 풍성한 삶을 누리는 지름길이다.

ⓜ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행하는 신자가 있고, 행하지 않는 신자가 있다.

열 처녀 가운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있고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으며,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있다. 만일 신자는 모두(all) 지혜로운 처녀이고,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관념을 가졌다면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지 ‘성경의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가르침’은 아니다.

ⓝ 구원은 ‘믿음의 문제’이지만, 천국은 전적으로 ‘행함의 문제’이다. ‘행함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대개 ‘이신칭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은 모순되지 않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우리들에게 때때로, 많은 경우에 ‘모순처럼 보인다’고 하면 필자의 지나친 억측인가? 이런 사고의 이면의 논리는 대개 이렇다.
“어떻게 죄악 된 사람이 하나님을 뜻을 행하고 또 천국에 들어간단 말인가? 구원이나 천국이나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 성경적이다.”

물론 이런 사상의 이면에는 누누이 필자가 강조했듯이 ‘구원=천국’ 구원과 천국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천년 이상 지속된 로마 가톨릭의 신학’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성경적이고 매우 겸손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편협한 관념에 구원과 천국의 개념에 대한 오해가 빚어낸 ‘사람의 생각’과 ‘전통의 생각’이지 ‘성경의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가르침’은 아니다.
필자가 다시 강조한다. 구원받는 것에는 ‘사람의 어떤 행위도 무가치’하다. ‘전적타락’한 인간은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는 구원받기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만일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이전과 같이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이것이야 말로 “너희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하신 주님을 ‘우리보다 못한 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분’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필자는 톰 크루즈 팬도 아니고 영화 홍보대행 계약을 맺은 적도 없지만 영화 제목 같은 말로 대신한다. ‘미션 임파서블!’

“불신자이든지 신자든지 사람은 어떤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생각은 어떻게 보면 매우 신앙적이고 겸손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논점은 사람의 선행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나 ‘광수의 생각’이지 ‘주님의 생각’이나 ‘성경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유월절이 무교절로 이어지듯이 유월절을 통과한 사람은 칭의 받은 사람으로 무교절로 상징된 ‘죄를 이기는 삶’ ‘의의 생활’을 할 수 있다. 물리학에 ‘양자역학’이 있듯이, 비슷해 보이는 양자를 구별하는 것을 대한민국 헌법의 ‘표현의 자유’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문장의 양자 역학’이라 부르고 싶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전에는 죄의 생명, 아담의 생명만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우리의 영’이 살리심을 받았다.

구원받은 이후의 행함은 ‘타락한 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밖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안으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if anyone is in Christ)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old things are passed away)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all things are become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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