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지난주는 12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존전에 자유롭고 당당하게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며 최고의 복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을 받았던 이방인들이 개들이 먹는 부스러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자녀의 떡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허락된 이 풍성한 은혜의 복이 사실 누구 때문에 맺히게 된 열매입니까? 바울이 여러 환난을 겪으며 복음을 전한 것의 열매입니다. 그런데도 에베소 교회의 일부 연약한 교우들은 바울이 아직도 옥에 갇혀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낙심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이 자유롭고도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녀의 특권을 얻은 것하고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13절이죠.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투옥과 그로 인한 여러 환난이 너희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바울이 빨리 석방되어서 1시간이라도 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믿음을 붙들어 주고 말씀 가르치며 그들을 격려해주는 것이 훨씬 하나님의 사역에 효과적이고 좋을 것 같은데 현실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이고 주님의 비밀의 경륜이 드러나는 방법입니다. 주님이 사역하실 때 얼마든지 많은 제자를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죽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기 전까지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내셨습니다. 이방인이던 유대인이던 누구든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이렇게 오래 동안 갇혀 있는 이유도 단 한가지입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도 지키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자신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행15장을 보면 초대교회에 예수를 믿는 믿음만 가지고 안 되고 할례를 받아야 온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유대인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 성도들을 설득하고 가르쳐도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들과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최초로 교회의 공회의를 소집하고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결론이 어떻게 났습니까? 이 문제를 다룰 때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서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도 과거에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그래서 할례와 다른 그 어떤 짐도 이방인 성도에게 지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는 특별한 설명을 해야 할 정도로 갑론을박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론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 외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어떤 다른 짐도 지우지 않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도 할례를 받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이토록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이 그 정도라면 교회 밖의 불신자 유대인들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들에게 바울이 전했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와 상관없이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이겠습니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미워하고 원수로 여겼습니다. 얼마나 미워했던지 바울 제거 특공대가 조직되어서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겠다는 사람들이 40명이나 모였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렇게 미워했다고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방인들도 할례 없이 율법 없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미움을 받고 고소를 받아 감옥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감옥을 나갈 수 있습니까? 이방인들은 구원 못 받는다. 할례를 받고 아브라함의 혈통이 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 율법의 절기와 음식 법 못 지키면 구원 못 받는다.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 이 한마디만 하면 금방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고소를 취하하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오래 동안 감옥에 있습니까? 이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옥 안에서도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 동안 옥에 있는 것입니다. 옥에 갇혔어도 복음을 전하니까 또 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당하는 여러 환난은 바로 이방인들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1:6절에 “우리가 환난 받는 것이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가 사랑하는 영혼을 위해서 얼마든지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래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것, 얼마든지 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오래 동안 여러 환난과 고난의 자리를 감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리이며 교회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능력을 교회와 세상 가운데 끌어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출21:1-6절을 찾고 말씀을 맺을까요.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고대 국가에서는 노예제도가 성행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종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 제도와 이방나라의 노예제도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종이 되는 경우는 세 가지입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을 때, 다른 하나는 율법에 의하면 남의 물건을 훔치면 일곱 배로 갚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갚을 능력이 없을 때, 또 다른 하나는, 너무 가난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때 부유한 사람에게 집과 의복과 양식을 제공받고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이스라엘은 안식년이 되는 7년째가 되면 자유를 얻습니다. 이때 세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독신인 종이 단신으로 왔을 경우는 단신으로 나가면 됩니다. 둘째, 결혼한 종이 처자들을 데리고 왔다면 처자도 함께 나가게 됩니다. 셋째, 결혼하지 아니한 자가 종이 된 이후에 주인의 여종을 아내로 맞아 자녀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그 종의 아내와 아이들은 나가지 못하고 영원히 주인의 소유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종에게 부여되는 특별한 선택권이 한 가지 있었는데 종이 상전과 처자를 사랑하여 자유를 원치 않을 때입니다. 그때는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그 귀를 뚫어 영원히 처자와 함께 그 집의 종이 되도록 했습니다. 얼마든지 자유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과 처자를 사랑해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고 귀를 뚫는 이 사람 때문에 그의 처와 자식들은 그와 더불어 주인의 사랑을 함께 입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럴 경우 그의 처와 자식은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귀를 뚫어 스스로 종이 된 것은 그들을 위해서이며 그들의 영광입니다. 이 종은 그냥 종이 아니라 영광의 노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세상은 할 수만 있으면 높아지려고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편안해지려고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기의 권리를 다 찾아서 누리려고 합니다. 쥐꼬리 만한 시간이나 권리라도 그것을 다 사용하지 못할까봐 안달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시간이나 아주 작은 돈도 자기를 위해서 써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을 못하면 난리가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을 통해서는 결코 이 땅 위에 임하지 않고 확장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이 절대로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의 교회에서 가장 귀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출세의 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편안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과 영혼을 사랑해서 오래 오래 감옥에 갇혀 있었던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우리 주위에 끌어오기 위해 우리 몸에 고난의 흔적을 남기는 영광의 죄수들 다 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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