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연구회 회원)

특히 개신교 신앙에 있어서 철저히 가시적(visible)이고 외형적(exterior)인 현대주의에서는 ‘이단’(heresy)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여겨진다. 보편적이고 통일된 신학의 입장 자체가 불명확한 현대의 종교적 분위기 가운데서는 사회적 순기능을 하거나 집단적 필요에 의한 논리로서 이단설을 상대화하여 평가할 수가 있으니, 한마디로 사회적 순기능이나 집단적 필요야말로 종교의 가시성이자 외형적 특성인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종교 혹은 교파(dinomination)는 그 필요성과 사회성이라는 외형적으로 드러난 특성에 따라 상대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다이어그램(diagram)의 한 영역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구원파나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에 대해서도 사회적 기능여하에 따라서 문제가 될 뿐,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원리는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지 않는다. 구원파의 세월호 사건이나 신천지 포교로 인한 청년들의 정신적 피폐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이단의 교리도 여전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확보한 교세(교인수)야말로, 그들 교리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사회적 목표다.

그러나 사실, 이단의 문제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류의 근본적이고도 끊을 수 없는 부패의 원형이다. 인류의 전적인 부패는 윤리 혹은 도덕적인 부패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의 근원적인 부패요 무지의 소산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부패가 가시화 된 것이 바로 형상(image)으로 된 우상(idol)인데, 이때의 형상이란, 단순히 외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오류와 무지를 근원적으로 지칭한다. 즉,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 이외의 모든 오류 혹은 무지가 바로 우상으로 형상화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원리에 있어서 이단의 문제는 사회적인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와 창조세계의 기원에서부터 시작된 근원적이고 심각한 본질적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구약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근본적인 죄상(arraignment)이 바로 우상숭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어 만든 황금송아지인데, 그 송아지를 가리켜서 백성들에게 아론은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출 32:8)고 했다. 바로 그 송아지 우상이야말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서 표현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에서 벗어난 그릇되고 망령된 오류로서의 모든 이단적 지식들의 가시적 원형인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망령된 지식의 끊을 수 없는 남용들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과 거룩한 사용으로서의 이스라엘 종교의 면면 또한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도록 기록되어 있는데, 성막(tabernacle)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temple), 특히 울타리와 성벽 등은 참된 하나님의 지식과 거짓되고 망령된 이단의 지식들을 구분하는 가시적인 상징물들이다.

그러한 상징성은 구약시대보다도 신약시대에 더욱 제도(institution & system)를 통해 가시화되어 제시되었는데, 특별히 교회정치제도는 그러한 배경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신앙의 외형을 이룬다. 바로 그러한 교회정치(jus divunum)로서의 장로교회들의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 그 가운데서도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과 가정예배모범(나중에 스코틀랜드에서 채택되어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으로 더욱 알려진)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참된 하나님의 지식을 둘러싸는 가시적인 울타리(혹은 성벽)을 단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가정예배모범에서는 6항에서 이르기를 “가족예배 시, 특별히 주의할 것은 각 가정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그 가정을 방문중이거나 식사에 초대된 손님들, 혹은 합법적인 어떤 경우로 꼭 초대되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이는 식사에 초대될 만한 충분한 유대와 상호신뢰가 있는 자들 외에는 반드시 교회법에 따라 합당하게 초대되는 사람만이 신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에 동참할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가정교회’운동에서처럼 신자의 가정을 개방하여 여러 가정이 목회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이를 전도의 방편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지양되어야 하도록 규정한 것이다(이러한 가정교회 운동의 ‘목장’제도와 셀 목회 방식은 이단들의 적극적인 포교수단에 대해 상당한 취약성을 내포한다). 아울러 지교회의 모임 이외에 소위 특수교회(para church)에서의 프로그램 및 강좌 등에 무분별하게 동참하는 것 또한 원래의 장로교회정치에서는 지양하도록 하고 있다(이와 반대로 그러한 모든 문제들을 신자 개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방임하다시피 하는 현대교회의 목회현실은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의 설문조사 및 성경공부 프로그램 등에 대해 매우 취약하다).

무엇보다 철저히 목사의 설교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예배순서는 목사에게 열쇠권이 위임되어 있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그런 만큼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가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엄숙하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윌리엄 구지가 언급한 것처럼 “목사는 그가 서 있는 하나님의 예배처소에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입이다. 그리고……목사는 회중의 마음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입이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회원인 성도들은 지교회의 목사와 당회의 지도와 치리 가운데 양육됨이 마당하며, 이를 벗어난 교제와 양육을 마땅히 지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반면에 회중주의적인 독립파 교회들에서는 이미 17세기에서부터 느슨한 교회정치와 다양한 교파들에 대한 교제를 공식적으로 용인하고 추구하는 것을 신앙고백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1658년에 런던의 사보이에서 회중교회들이 개최한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 1658)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모여 운영되는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이 (조금 순수하지 못하더라도) 진정한 교회로 판단하여, 그러한 교회의 회원들을 경건하며 허물이 없이 살아간다고 할 만큼 충분히 입증된 것으로 여겨, 그들과 무시로 친교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침례교 신앙의 순수주의와 조화되어 전체 개신교파의 일반적인 기류를 형성했는데, 그러한 기류의 결과로 현대주의의 교회풍토 가운데서 초교파(non dinomination)적인 연합운동의 시류가 형성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파적인 엄밀함을 스스로 무너뜨리다시피 한 현대의 장로교회들 대부분은 신천지구원파, 혹은 JMS와 같은 이단들의 불건전한 포교활동에 심각하게 취약해져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러한 취약성은 앞서 언급한 참된 하나님의 지식과 거짓되고 망령된 이단의 지식들을 구분하는 가시적인 상징물들을 무너뜨리고 사라지게 만든 결과로 인해 오래도록 배양된 배지(medium) 가운데 형성되어 있어서,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바로 그러한 배지 위에 넓게 퍼져있는 포자가 바로 이단과 WCC와 같은 연합운동의 확산인 것이다.

결국 참된 하나님의 지식과 거짓되고 망령된 이단의 지식들을 구분하는 가시적인 상징물들이라 할 수 있는 장로교회의 교회정치와 이를 반영한 예배모범에 바탕을 두는 목회의 재구현은 현대의 장로교회들이 당면한 지극히 시급한 현실이자 과제라는 사실을, 이단들의 창궐과 만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단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제라도 장로교회들에서 창(무기)을 들고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는 느헤미야의 영적 전쟁이 신실히 수행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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