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법적 관계에서는 누구든지 법조문이 규정한 대로만 이행하면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지만 인격적 관계에서는 법조문보다 선행되고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상대에 대한 신뢰와 존중입니다. 아무리 법조문대로 잘 이행했다고 해도 신뢰와 존중이 없는 법 이행으로는 원만한 인격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법적 관계이면서 또한 인격적 관계입니다. 특수한 것은 하나님께서 법보다 높은 권위를 갖고 법 위에 초월해 계시면서도 법을 존중하시고, 또한 인간이 아무리 법을 철저하게 이행하여도 하나님 경외함이 없으면 철저한 법 이행을 불법으로 취급하십니다. 이것은 거짓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는 계율만 철저하 지키면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온갖 공적을 쌓아도 마음에 하나님 경외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나 구례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이 점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경우가 많았고, 신약의 교회들도 바로 이 사실을 오해하거나 왜곡할 때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내용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레 26:12; 렘 7:23, 31:1, 33, 37:27; 겔 34:24, 37:27; 고 후 6:16; 하 8:10; 계21:7). 그리고 언약의 의무규정은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언약의 의무 규정으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레이기의 전체 내용은 제사법에서부터 각종 개인적 또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것인데, 그 모든 것은 언약의 의무규정인 십계명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의 의무규정을 말할 때 언약의 내용을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 전제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의무규정은 언약의 부가적 복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언약의 핵심적인 복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부가적인 복은 기업인데, 기업의 핵심은 하나님이지만 부가적으로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복으로 땅을 주셨습니다. 모든 복은 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땅을 주신 것은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 부가적 복인 기업 즉 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언약 의무규정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사실은 땅을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하고 대하느냐 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언약의 의무규정인 십계명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율법과 구례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주신 방법들입니다. 십계명이나 수많은 제사법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규범들을 철저하게 지켜도 언약의 내용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러한 일들이 수차례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이나 언약의 의무규정에 제시된 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율법을 열심하 지키고 제사를 열심하 드리면서 동시에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가 악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문명은 발전과 지식이 더함에 따라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순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죄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믿고 열심하 교회에 다니고 여러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선교와 구제와 기도와 예배에 참여하지만, 그것은 마치 지식과 문명의 발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경외함이 없이 교회의 규범에만 집착하고 열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열심하 다니고 교회 활동에도 성실하게 참여하지만 동시에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도 탐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열심과 업적과 진정성으로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참으로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외적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 성장을 주도한 대표적인 대형교회들은 불신자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중소형 교회들은 그 대형교회들과 같이 되려고 대형교회들의 프로그램들을 표방하고 배우려고 합니다. 대형교회들은 더 적극 중소형교회들에 교회 성장 비결을 가르치려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보급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했던 대형교회들의 지금의 모습들은 물리적 규모나 힘은 여전하 대단할지 모르지만 성결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열심하 율법을 지키고 열심하 제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돈과 권력과 쾌락을 탐닉한 것처럼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열심하 교회에 다니고 온갖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돈과 권력과 쾌락을 탐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기독교인이나 불신자들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대형교회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중소교회도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며 대형 교회와 같이 성장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가 잘못되면 그 물리적 영향력에 버금가는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대형교회는 물리적으로 막강한 힘을 믿기 때문에 바른 지적과 비판을 숨김없이 그대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소 교회는 복음을 왜곡하거나 잘못을 저질러도 누구의 지적이나 비판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형교회는 물리적 힘 때문에 바른 충고나 지적을 무시하여 회개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에 위험하고, 중소교회는 누구의 지적이나 충고를 받지 않아서 회개할 기회를 잡지 못하여 위험합니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교회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하고 잘못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하거나 진리를 왜곡하는 것도 문제지만 바른 지적을 받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지만 회개하지 않는 개인이나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지도자는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분명한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일깨우고 인도하여야 합니다. 구약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입니다. 언약의 본질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아주고 인도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가르치고, 예배와 기도와 선교와 모든 교회 활동들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가르치고, 언약의 내용을 마음에 담고 그 토대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지도자의 몫입니다. 현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언약의 의무규정들에 해당하는 교회성장 방법론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언약의 내용을 왜곡하게 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하면서도 언약의 내용과 언약의 의무규정을 혼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을 열심하 지키고 제사를 빠짐없이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거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을 우리의 거울로 삼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개인이나 교회를 비난하거나 낙심하는 것은 바른 대안이 아닙니다. 지도자에게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핵심을 믿는 것과 그 믿음을 가진 자의 실천 규범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언약의 의무규정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들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뿌리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벌였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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