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3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엡4:1-6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어떤 사람이 친구 아내가 죽어서 문안을 갔는데 같이 간 친구가 그렇게 많이 울더랍니다. 남의 아내가 죽었는데 우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생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냐? 하는 생각에 물었습니다. “아니 남의 마누라 죽었는데 네가 왜 울어?”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 “우리 마누라는 아직 안 죽었잖아”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생이 자기 혼자 무인도에서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오죽 했으면 아내가 죽은 친구를 부러워하고 자기 와이프는 아직 안 죽었다고 울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이란 그렇게 안 죽고 같이 사는 그 시간에 무릇 더 깊어지고 연단되고 넓어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장까지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하셨는지를 다루는 교리부분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택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위해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구속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택함 받은 백성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사용해서 성도를 믿음으로 인도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어 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성도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들로 만들어 가실 때 교회를 통해 함께 자라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가지고 교회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탄생되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 이라는 영광 가운데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가족이 되어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에베소서 1-3장까지가 이 진리를 설명한 교리에 해당되는 내용이었다면 4-6장까지는 그러한 진리의 교리를 어떻게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실천적인 내용의 전체를 아우르는 서론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합당하다는 것은 어울리고 조화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통해 내 뜻과 계획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내 뜻을 굴복시키면서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응답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부르심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하나님이 왜 부르셨으며 어떤 목적을 위해 부르셨는지를 알아야 하겠죠.

성경전체를 살피면 너무 많으니까 에베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만 간단하게 다시 살펴봅시다. 1:4절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1:5절 은 우리를 일군이나 잡역부로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1:6절은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고 불렀다고 했으며 2:10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도는 1:18절에서 기도하기를 너희 마음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을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4:13-16절을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성도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 온전한 사람이라는 부르심의 소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온전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었고 죄에 빠져서 너무나 많이 망가지고 왜곡되고 오염되고 비뚤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죄와 사망 가운데 불러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도의 온전함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성령을 통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신비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소망과 한 믿음과 한 사랑을 가진 몸의  지체가 됩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입니다. 앞으로 하나 될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한 지체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각각 신앙의 수준도 틀리고, 생긴 모양도 출신 성분도 틀리지만 하나입니다. 이 하나 됨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유니포미티가 아니라 유니티입니다. 각기 다양하지만 하나입니다. 믿음이 하나이고 소망이 하나이고 세례가 하나이고 같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풍성합니다. 주를 믿는 믿음은 하나이지만 그렇게 믿게 된 과정과 체험은 얼마나 다양합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연합시키시고 성도와 성도를 하나로 연합시켜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이 공동체 가운데 직분과 은사를 허락하셔서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온전한 사람으로 예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삼위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사용하셨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어떻게 하든지 이 하나 됨을 깨트리려고 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자신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에는 본성적으로 너무나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다 고매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지만 사실 안에는 다 깊은 죄 성들이 있습니다. 죄는 오직 자기만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켜서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속이고 방해합니다. 이 죄가 우리를 얼마나 깊이깊이 깨트려놓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자주 마음이 상하고 그 상한 마음으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게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상한 마음을 고침 받고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힘써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힘을 다해야 합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매라고 합니다. 먼저 겸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겸손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내 실력, 내 지식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 남을 인정하는 태도, 이것이 겸손이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의 기본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하나 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헬라문화에서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비굴함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주덕’으로 알려진 신중, 용기, 절제, 정의입니다. 그들은 으뜸이 되기 위하여 열정적이었으며 자기주장과 자기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갈망했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겸손을 삶의 낙오자나 실패자가 하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사회의 풍조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겸손이 중요합니까? 겸손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이 한마디 하면 전부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전부 피합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하고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참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통해 이 기본부터 훈련받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이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기가 최고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하셔야 합니다. 남을 인정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단순히 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한 것이 온유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 주위에 순하면서도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온유는 미련하고 온순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주인에게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야생마 같은 우리를 거룩함이라는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잡아오셔서 교회를 통해 길들이시고 훈련시키시고 통제하시어서 모든 일을 주님의 손에 맡기게 하십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주님께 길들여진 상태, 이런 온유가 훈련될 때 상대가 나의 권리를 무시하고 나를 힘들게 할 때도 똑같이 갚아주지 않고 주님께 맡기면서 그것을 긍휼히 여길 줄 알게 되고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부자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배웁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 됨을 깨트리는 대부분의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소한 것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자존심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 한 마디하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밤새도록 생각하고 간직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시는 그 사람하고 상종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무슨 자존심이 있습니까. 온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지 우리의 자존심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별로 중요치 않는 것은 양보도 할 줄 알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속성을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은 결코 짧은 시간에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을 알 때 나오는 자세가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부부사이를 보십시오. 늘 같이 사는 아내와 남편도 못 바꿉니다. 보통 사람이 사람을 바꾸려고 할 때, 그것도 한 두 마디 말로 그 사람을 바꾸어 보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을 알 때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오래 참는 훈련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다음은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추어 바꾸려는 의도 없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자꾸 어려워지고 무너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것 때문입니다. 자기는 그대로 있고 상대방만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입니다.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을 나에게 뜯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읍시다. 교회는 늘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모든 일을 신속히 하고, 낭비 없이 하고, 매끄럽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의 거룩함과 온전함을 이루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기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 나가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어떤 때는 지식이 무식 앞에 무릎을 꿇고, 똑똑함이 어리석음 앞에 양보하고 가진 자가 안가진자를 섬기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빛내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의 힘이 나의 무기가 아니며, 나의 자랑이 아닌 것을 실제로 훈련 받고 우리가 모르는 힘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지혜가, 우리가 갖고 있었던 어떤 무기와 방법보다도 더 놀랍게 역사하며 열매 맺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학원처럼 자기의 필요만 채우기 위해 모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교제하는 친교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절절히 깨달아 알아 힘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면서 우리의 본성들이 깨트려지고 쳐서 복종되면서 서로 온전하게 자라가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고 우리를 불렀습니다. 교회 안에 깊이 들어오셔서 이런 훈련들을 하시고 자라가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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