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여러 번 읽었는데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은 마치 처음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루 한 장 읽는 『날마다성경읽기』는 우리 교회에서 10년 넘도록 계속해 온 성경공부인데, 마침 지난 주간에 이사야 마지막 두 장을 읽었습니다. 이사야 1장에 나타난 선민 유다와 예루살렘의 하나님께 대한 배반에 대한 묘사가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에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되는 배교에 대해 충격이 무디어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사야 1장이나 마지막 장들에서 지적되고 있는 유다의 배교는 나에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잊히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고 완전히 세상적 방식으로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일상적인 하나님 섬김의 모든 계명과 방법들을 버리고 세상적 방식으로 배반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 백성의 그러한 하나님 배반의 행위를 충격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헛된 제물을 드리고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견딜 수 없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제사가 하나님께 참지 못할 역겨운 행위가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는 단순히 제사행위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불법을 자행하고 약자에 대하여 무자비한 것 등 일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죄를 지적 받아도 일체 바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것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행위 자체가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행이었음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사와 모든 신앙행위를 열심히 하면서 동시에 악을 행하였고 그것은 곧 신앙행위 자체까지도 악행이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배반의 이 같은 행태는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했던 시기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같은 왕들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는 유다의 배교가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아하스는 정치적으로 친 앗수르 정책을 폈으며 종교적으로는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고, 힌놈의골짜기에서 어린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쳤고, 성전 문을 폐쇄하여 백성들의 성전 출입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온갖 이방의 의식들을 도입하여 율법을 범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아버지 아하스의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였지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의 개혁정책을 버리고 조부 아하스의 악한 길로 돌아갔습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극심하던 시기에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소명을 받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강하게 느끼고 좌절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할 일군을 찾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 6:9-1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의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었고 이사야가 백성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한 소명입니다. 가서 회개를 외쳐봐야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을 미리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의 사역의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고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목이 터져라 안타깝게 외쳐도 소용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자를 결코 죄 없다고 아니하실 것이라는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전 방위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이들에게 임할 것이고 그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하여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의 상황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선고되었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셨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보고 듣고 깨달아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염려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의 본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의 엄중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유다의 구원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가능성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너무도 준엄하게 실제적으로 임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그의 소명 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알아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사야는 그 은혜를 받았고 유다 백성들은 그 은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이사야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처럼 은혜를 입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고 하셨습니다.

“그루터기”즉 남은 자 사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루터기, 거룩한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택함 받은 백성이 구원 받을 것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예언자의 왕으로 불리는 데 그 이유는 첫째 그의 탁월한 능력이고 둘째는 그의 예언 중 메시야 예언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구약의 어느 선지자보다 메시야에 대하여 많은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도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소망 없는 유다에 대한 좌절을 넘어 남겨진 그루터기에로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합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배교와 형벌이 반복하여 교차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사무엘과 왕정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왕정은 3대인 솔로몬 이후에 깨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가로부터 10지파가 분리해 나갔습니다. 분열을 주도한 여로보암은 정치적 분립을 종교적 분립으로 만들어 단에 우상을 세우고 율법적 제사제도를 버려서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북 이스라엘 에브라임 왕국은 2세기 반 동안 배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소리를 높였으나 소용없었고 결국은 파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남 유다는 율법과 성소와 제사직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북 이스라엘보다 특혜를 누렸고 경건한 왕들의 통치와 개혁에도 불구하고 역시 배교의 길로 나아가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언약과 하나님의 나라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그 배교의 역사의 와중에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남은 자들을 보존하셨습니다.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그 배교의 시대에 비교적 의로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의무 규정에 신실했습니다. 남은 자들 중에는 아합의 배도와 억압적 폭정 아래서 바알에게 절하지 않았던 7천명도 있습니다. 남은 자들은 경건한 자들이었고 의로운 자들이었고 동시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노래에 등장하는 남은 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신앙을 언약의 하나님께 두며 언약을 거슬러 그릇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 화려한 왕궁보다 주의 성소에 거하기를 좋아했고, 날마다 주의 율법을 묵상하며 언약을 믿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민족의 총체적 반역과 배교의 도도한 탁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선포하고 노래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시대가 암울하고 어려울수록 그들은 더욱 언약에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열조와 세우신 언약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깨뜨리지 않으실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들, 그루터기들은 의롭고 경건한 자들이었지만 대부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기득권층이 아니라 가난한 약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남은 자들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수 없이 하나님께 반역을 거듭하였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그루터기를 남겨두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셨고 배교하는 백성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을 때 엄중히 심판하셨고 그 와중에도 그루터기를 남겨두셨습니다. 남겨진 그루터기들이 배교의 시대에 경건과 의로움으로 믿음을 지켰던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경건하고 의로워서 남겨진 것이 아니고 은혜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겨진 그루터기들이여, 이 시대의 물리적인 특혜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속적인 것들에 착념하지 맙시다. 그루터기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들이 구가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와 특권의 유혹에 자신을 팔지 않고 영적 자존감을 지켰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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