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righteousness)와 칭의(Justification)

저자 송명덕 목사는 오직 한 길만을 간 목사이다. 총신대학교와 총신대 학 신학대학원과 총신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화성 동탄의 제자비전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계시록 강해집 “때를 알라 주님이 오신다』(광야의소리), 칭의론 논쟁의 기본 문제를 다룬『저 사람 천국 갈 수 있을까』(좋은땅)가 있다.<편집자 주>

 

4. 산상수훈의 의(righteousness)가 칭의라고 가정한다면?
 
  산상수훈에서 언급된 ‘의’(righteousness)가 양대 칭의론자들이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는 ‘칭의’ (Justification)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 되시는가? 제자들이라는 것은 적어도 ‘칭의’ 즉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의롭다 하심 받은 것’을 ‘깜빡 잊으시고’ 말씀하신 것이든지, 또 걸 그룹 ‘트와이스’(twice)가 가요랭킹 1위에 등극하니 ‘트와이스’(twice, 다시) ‘의롭다 하심 받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이해×2.5’이다. 혹시 우리는 깜빡할지라도 주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롭게 되는 것은 ‘단회적’이고, 결코 ‘반복적’인 것이 아님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다.

만일 ‘의’(righteousness)와 ‘칭의’(Justification)가 동일한 개념이라고 끝까지 고집하고 싶다면 적어도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재물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한 시도가 성공했어야 가능하다. 비록 하나님께서 발람이 가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하시기는 커녕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는 분’임을 선포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계획이나 성경의 한 단어도 바꿀 수 없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righteousness)보다 ‘나은 의’(the righteousness)’를 가르치신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제자들이 ‘이 의’(義)를 ‘이미’ 소유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이 후에’ ‘소유해야 할 것’임을 가리킨다. 칭의는 ‘이미’(already)이지만, 의는 ‘아직’(not yet)의 성격을 띤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의(義)를 추구해야 할 것을 언급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산상수훈의 의’(義)가 ‘구원받을 때 주어진’ ‘칭의’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칭의 이후에’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유전자검사원에서 친자확인을 위해 DNA를 하듯이 칭의와 의의 DNA를 검사를 해보자.

① 칭의(Justification)의  DNA vs 의(righteousness)의  DNA

ⓐ 칭의의 대상은 ‘죄인’이고, 의(righteousness)의 대상은 ‘신자’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칭의/구원’이고, 신자에 대한 요구는 ‘의’(righteousness)이다. 이것은 구약의 유월절이 죄인에 대한 ‘칭의/구원’을 의미한다면, 유월절에 이어지는 무교절은 누룩이 없는 삶, 죄를 이기는 의로운 삶으로서 칭의/구원을 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인 것과 같다.

ⓑ 죄인은 어떤 선한 행위 즉 의(righteousness)를 행할 수 없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인 ‘칭의’이다. 그러나 칭의를 받은 신자는 ‘선한 행실’ 즉 ‘의’를 행할 수 있다.

ⓒ 칭의의 성격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법정적 선언’이다. 반면에 의(righteousness)는 ‘하나님의 법정 밖’의 문제 즉 ‘생활의 문제’이다.

ⓓ 칭의는 ‘죄의 문제’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반면에 의(righteousness)는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 칭의는 ‘단회적’이지만, 의(righteousness)는 ‘계속성’의 성격을 띤다.

ⓕ 칭의는 ‘이미’(already)의 성격을 띠지만, 의(righteousness)는 ‘아직’(not yet)의 성격을 갖는다.

ⓖ 칭의는 하나님께서 수여하는 ‘수동적’ 성격을 띠지만, 의(righteousness)는 ‘생활의 의’로서 ‘능동적’ 성격을 띤다.

ⓗ 칭의의 가치는 ‘사람은’ 볼 수 없고, ‘하나님만’이 보신다. 그러나 의(righteousness)는 ‘행위의 의’(righteousness)로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오늘날 신자일지라도 ‘행위로서의 의’(righteousness)가 없다면 세상의 비난을 받는다. 과거 교회가 세상을 걱정할 때는 교회가 의(righteousness)를 가졌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데까지 온 것은 의(義)가 없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의롭다 하심’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의 행위의 의’는 신자의 의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 칭의를 받은 신자가 ‘생활의 의’ ‘행위의 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의롭다 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증거들은 칭의와 의의 DNA가 다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자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② 예상되는 한 가지 반론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우리들 가운데 “어떻게 불의한 인간이 의의 행위들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알러지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필자가 볼 때 이런 논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지옥과 같은 끔찍한 곳’을 만들 수 있느냐”는 여호와의 증인의 논리와 유사하다. 성경은 죄인인 사람은 절대적으로 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필자도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후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전에는 죄인이었고 정죄와 심판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 만일 이것을 부인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심각한 일이다.

‘칭의’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들이 ‘의’(righteousness)의 길을 갈 수 있는 근거는 신자 자신에게 있지 않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Justification)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지 못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의의 길’을 갈 수 없다.

그러나 신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치’와 ‘신분’이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의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칭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신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른다. 이것은 듣기 좋으라고 말하는 ‘립 서비스’(lip service)가 아니라 영적인 실제이다. 칭의와 의(righteousness), 양자의 ‘차이나’(china)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차이나’(China) 방문 1억 번째 관광객으로 선정되어 ‘차이나’(China) 평생 무료 항공숙박여행권을 받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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