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13, 2014년 8월 3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마음은 소녀시대인데 몸은 노사연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마음만으로는 뭔들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마음 같지 않는 현실이죠. KBS의 우리 동네 예체능이라는 프로에 조우종이라는 아나운서가 축구선수로 뛴 적이 있습니다. 이 아나운서는 이번 브라질 월드컵 중계방송의 메인 아나운서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축구에 대한 이론이 밝겠습니까? 그런데 중계방송의 해설과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볼을 차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막상 운동장에서는 5분도 안되어 숨을 헐떡거리며 죽기 일보 전까지 가더군요. 마음은 뻔한데 몸은 볼을 따라가지 못하고 발은 허우적거리고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넘어지고 자빠지고...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라운드에서 직접 하는 축구가 해설할 때 머리 속으로 뻔히 알던 그 축구가 아니었던 것이죠.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은사와 직분이라는 두 가지의 선물을 주셔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며 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수준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수준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만 그 아들을 닮지 않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유치한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불러 은사도 주시고 직분도 주셔서 성숙하게 자라게 하시는데 어디까지 자라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13절 말씀을 다시한번 읽을까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여기 온전하다는 것은 “텔레이오스”로 퍼펙트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숙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예수님을 닮을 때까지 자라고 성숙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다른 것을 목표 삼기 이전에 주님이 주신 모든 은사와 직분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처럼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와 그 안의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닮는 자리까지 성숙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못하면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가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다를 수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앞서 예를 든 조우종 아나운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나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의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고 언제 어디서든, 그가 인도하는 자리까지 따라간다는 믿음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겠네. 노래하고 찬송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마음과 같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과 같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지식과 같지 않을 때가 있고 반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믿음으로 발휘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안다고 할 때 안다는 말은 ‘에피그노세오스’로 오류가 없는 참되고도 정확한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참되고 정확한 지식은 어떤 지식입니까? 머리로만 아는 정보적 차원의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그노시스’ 직접 삶으로, 몸으로 경험해서 아는 체험적 지식에 근거한 앎입니다. 그것이 에피그노시스, 참되고도 정확한 지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정보적인 차원에서 알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나의 전 삶을 통해 펼쳐가며 몸으로 체득한 믿음,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이 오류가 없는 참되고도 정확한 지식이 되게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머리로만 믿는 것으로는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주를 믿는 믿음이 그를 에피그노스적으로 아는 참되고 정확한 지식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열심히 믿는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정작 나중에 주님을 만나면 낯설게 됩니다. 그분이 묻습니다. 너 누구니? 예, 누구시죠? 실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뵈었을 때 내가 열심히 믿었던 그 주님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정말 가능할까요? 어릴 때는 가능하지만 끝까지 이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런 믿음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이 연결되지 않고 어느 자리에 머무는가 하면 그저 하나님이 어려움을 막아주고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니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되어 있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믿는 믿음을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삶의 현장에 펼쳐내어서 아! 정말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오고 온 몸으로 체화됩니다. 그것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것이 오류가 없는 참되고 정확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영생입니다. 생명입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계방송만 하고 해설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말씀을 붙들고 믿음을 삶의 현장에서 펼쳐내는 과정을 통해 쌓여지는 것입니다. 직접 땀 흘리고 그라운드에서 볼을 차야 되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그것을 외면하면 우리의 헌금과 기도와 예배와 모든 신앙행위는 그저 어려움을 막아주는 부적이 될 수 있으며 지금 보다 더 나은 삶, 지금보다 더 안락하고 윤택한 삶을 위한 투자정도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며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오늘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가 어려서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어려서는 안 됩니다. 자라나야죠. 하나님을 나의 안위를 지켜주고 나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그 무엇쯤으로 여기는 그 유치하고 어린 자리에서 벗어나야죠. 벗어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면 14절의 말씀처럼 조금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말, 조금 더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며 하나님이 낯설지 않고 그와 하나 되어 가는 신앙의 진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면 그분이 낯설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낯설면 안 됩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그리스도를 대면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과연 그리스도가 낯설지 않겠습니까? 내가 늘 삶의 현장에서 고민하고 물어보고 기도하며, 메어 달려서 나에게 말씀해주시고 응답하시고 가르쳐주신 그분이 맞겠는지요?

이것은 사실 요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욥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욥19:23-27절까지 봅니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욥이 지금 기가 막힌 고통 속에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왜 이런 어려움과 고난을 겪여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서 더 힘들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몰아붙이고 악인이라고 몰아붙이는 친구들 때문에 더 힘듭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고, 말씀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몸부림칩니다. 절규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대속자를 찾습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니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즉 내가 죽은 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합니다. 부활신앙입니다. 이 땅에서 답이 없다면 죽음 이후 영원한 그 나라에서 답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때 답을 얻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말이 그 뒤에 나옵니다. 그때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뵙는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욥이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답이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차마 말씀을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어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까지 믿음으로 살려고 버티고 있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고통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리로 떠밀려 갑니다. 친구들과 그 전에 자신이 알고 있었던 인과응보의 원리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법칙과 원리를 뛰어넘어 까닭 없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까닭 없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그래서 자신에게도 까닭 없고 이유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 복을 주시지 않아도 어려움에서 지켜주지 않아도, 그런 이유가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요구하시는 하나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자신의 생을 부르고 사랑이라는 내용으로 자신을 불러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을 고통 속에서 눈물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때 그 분이 낯설지 않습니다. 어!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어. 하지 않습니다. 내가 눈물 속에서 찾았던 그 하나님이 맞습니다. 내게 침묵하셔서 너무 원망하면서 찾고 찾던 그 하나님이 맞습니다.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남은 인생을 그 자리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부름 받아 이 영광스러운 믿음의 진보를 모든 은사와 직분을 통해 이루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낯선 분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어려움이 없는 것을 전부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행복하고 안락한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낯설면 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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