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3

요 1:9~13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 어떤 중간 매체가 끼어서도 안 된다. 중간에 끼어들면 빛을 방해하는 자가 된다.(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참빛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런데 그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은 그 빛을 알지 못했다. 그것도 자기 백성에게 왔는데 자기백성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끝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전 세계로 확대된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것이다.(요1:12)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즉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를 바로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1:11에 자기 백성이 나오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이 세상나라의 대표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예수를 거부했는가? 생명과 빛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망하기 위한 선택이다. 성전도 부수기 위해 짓는다. 안식일도 깨기 위해서 주셨다. 율법도 죄를 더하기 위해 주셨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나는 아니오”, “나는 못해요”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실패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을 오는 대로 다 죽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이다.(마21:33-39) 이스라엘은 곧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삶을 반영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계속해서 성령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활동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활동하심의 도구로서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이다.

요1:12에서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 영생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영생’(ζωὴ αἰώνιος)이란 단어가 37번 나온다. 그리고 생명(ζωή)은 36번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영생’과 ‘생명’은 같은 의미이다. 또 요한은 ‘구원’을 ‘영생’이라 칭하며, ‘영생’(생명)과 ‘구원’은 동의어이다. 영생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영생과 생명은 모두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다. 영생은 메시아가 예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 곧 아들을 믿는 것이 영생을 위한 기초이다(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결국 영생(생명)은 구원을 의미하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바로 이 점에서 바울과 요한의 구원론은 일치 한다.

한편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면 앞으로 일어날 우주적 종말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십자가 종말 사건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이미 끝난 세상에 살고 있다. 말씀은 이미 다 이루어졌고 확정되었다. 하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데 우리가 뭘 붙들고 있는가?

우리가 사는 것은 역사가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주적 종말이 언제 오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예수 믿기를 바란다. 지금 죽어 버리면 종말이 오든지 말든지 나하고 상관없다. 예수를 믿으면 이미 끝난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이 세상을 끝내버린 그 분만 믿고 바라보고 살게 된다. 예수의 종말에 뛰어든 존재가 된다.

영접하는 것은 누가 우리에게 덮쳐 오는 것, 즉 덮쳐오는 그 사랑에 의해 덮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들어 낸 믿음이 아니라 외부에서 날아와서 나를 덮어버린 그 사랑을 내어놓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나는 아니오, 나는 끝난 사람이다”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을 증거하고 영접하면 생명과 빛은 그 속에 들어온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생명이 들어 있고, 빛이 들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요1:12의 영접한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성령은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다.(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영접하는 그 인간이 원래 말씀이 창조했던 그 의도대로 합당한 인간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즉 영접하는 그 인간이 본래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 인간이라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가 본래 인간이다. 본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생명과 빛은 은혜로만 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안에만 은혜가 있다. 이 말의 뜻은 어떤 중간 매체도 필요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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