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다니엘 주석 7 강) 다니엘 2:20-23
1. 칼빈은 다니엘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찬양하는 부분에서 날마다 찬송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칼빈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주신 탁월한 은사를 깨달았음을 제시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 막중한 일이 다니엘에게 임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방편을 찬양했다. 필자는 성도가 특별한 도구가 되도록 구하지 않기를 제언한다. 다니엘도 자신이 특별한 도구가 되도록 구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게 임함을 인정하고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는 특별한 훈련을 거쳐 특별한 고통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막 10:28-31). 그럼에도 주의 백성이 특별한 도구를 수용하는 것은 은혜이고 상(유익)을 알기 때문이다(히 11, 12장).
2.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특별하게 사용하시려고 지혜와 능력(the wisdom and the strength)을 주셨다(20절). 다니엘은 지혜와 능력을 구했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주셨다. <※개역에서 ‘권능’을 능력으로 개정했다> 다니엘은 지혜와 힘을 구했다. 느부갓네살 앞에 서기 위해서는 유대와 바벨론에서 익힌 지혜로는 불가능하고, 제국의 통치자 앞에 서서 주의 묘략을 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전능자께서 직접 느부갓네살을 통제하지 않으시고, 약하고 약한 포로의 입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펼치시고 있다. 그 하나님과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들린 다니엘은 지혜와 힘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풍성이 나에게 있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종지(종발보다 작은 그릇) 비유를 많이 한다. 하나님의 특별을 담기 위한 영혼의 그릇은 특별하게 단련되어야 한다.
다니엘은 지혜와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 기물과 포로를 끌고 시날로 돌아왔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그것은 포로인 다니엘의 경륜이 없으면 피가 말라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겸손하게 믿고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다니엘을 통해서 바벨론에 퍼지게 될 것이다.
3. (21절) 다니엘은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했다. 때, 계절, 왕은 변화하지만(Mutatis mutandis) 하나님은 변화하지 않는다(不變性, immutability). 현대철학에 들어와서 세계정신은 준용(準用)을 진리를 표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인간학이라고 하고, 그 근거에 있는 신학도 인간학이라고 한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지식이 온 세상에 풍성하게 현시되어 있음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지혜에 대해서 묵인하고 자연신을 창안해서 대체시켰다. 칼빈은 지혜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선언했다. 다니엘은 때, 계절, 왕을 하나님께서 변화시킨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세대가 항상 변하는 것 같지만 변하지 않는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고대 사상에서부터 윤회를 생각했다. 서양 철학은 직선 사고라고 하지만 플라톤, 쇼펜하우어, 헤겔 등은 윤회 사상을 믿었다. 칼빈은 태양이 변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시절에 따라서 일조 시간이 다르다고 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한 현상은 인류 지성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은 한 문장으로 해결했다. 변화무쌍을 주도하시는 주 하나님을 선언한다. 인간은 변화무쌍을 관조한다. 가장 훌륭한 서적은 역(易), 주역(周易)이다.
다니엘은 왕을 폐하시고 세우시는 분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느부갓네살이 대 정복자이지만 그의 보좌도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전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세계일까? 맹목적인 신앙은 맹목적으로 기도하며 요행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인격적인 신앙은 모든 환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왕의 폐하시고 세우시는 것을 고백하고 찬양한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전적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정복되어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 하나님을 전능하고 유일한 지혜의 원천임을 고백한다. 성도의 인내를 볼 수 있다. 우리는 환난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마음 깊은 곳에서 찬양해야 한다. 맹목적 신앙이 없이... “무조건 믿자”라는 맹목적 신앙에 머물지 않도록 힘써 구하고 믿음의 정진을 이루어야 한다.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wisdom and understand)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지혜자와 지식자로 삼으셔서 자기 일을 하실 것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다짐하고 있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전능자께서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으니, 받은 은사대로 충성을 다해 주의 사역을 진행해야 한다.
4. (22절)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진술하고 있다.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일을 나타내며 어둠을 빛으로 인도한다. Post tenebras lux
선지자가 하는 일은 은밀하고 희미한 주의 세계를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지자의 직분이 있는데(munus triplex christi, propheticum, sacerdotale, regium munus),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명료하게 제시했다. 다니엘도 어둠에 쌓여 있는 느부갓네살을 밝혀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 주어야 한다. 간혹 인간의 무지를 이용한 거짓 교사들이 가짜빛을 보여준다. 우리는 가짜빛인 어둠에 속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계시의 때는 바로 계시를 받아 알 수 있지만, 계시가 완성된 우리 시대에는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소경은 가짜빛을 진짜빛으로 착각할 수 있다. 칼빈은 번개빛으로는 사물을 인지할 수 없다고 비유한다.
그리스도인은 지혜와 지식이 깊어지면 질수록 하나님을 찬양한다. 많은 사람의 칭송에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고백하며 찬양한다. 성도에게 가장 큰 채찍은 인간의 칭찬과 영화이다. 사람의 칭송을 이전하면 칭송의 테두리 안에 자신을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은 무한으로 가는 한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경배한다. 하나님의 빛으로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는 어둠에 쌓인다. 하나님은 어둠의 보좌에 계신다(왕상 8:12). 무지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어둠을 거두어 낸다. 신적인 빛(divine light)은 하나님께서 조명(God’s illumination)한 것으로 하나님을 알도록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서 모든 지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한 빛을 잡는 것이다. 인생에서 확실한 지식을 모두가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인지, 자기 인생에서 자기화한 자기지식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지식은 확실한 지식이다.
5. (23절)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열조의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열조의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히브리 사고에서 열조, 할아버지 개념은 없고 아버지 개념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화려한 신들이 아닌, 예루살렘을 지키지 못한(?) 열조의 하나님을 오직 한 하나님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계시를 확실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신이 있다고 했다. 교황주의자들은 신공장(god factory)이다. 신이 풍성하면 할수록 인간의 마음은 공허해진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은 신을 창안해야 한다. 16세기 유럽은 만성(All Saints' Day)을 이루었다. 미국 만성절은 할로윈데이(Halloween day)이다. 미국 만성절은 교회 밖으로 넘쳐 귀신 축제가 되었다.
다니엘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조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녀임을 기쁘게 고백한다. 멸망된 조국, 조상을 기뻐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칼빈은 다니엘이 하나님의 양자 개념을 취했다고 분석했다. 다니엘은 아브라함과 유대가 민족적으로 선택되고 양자됨이 있다고 선언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심을 고백했다. ※ 개역개정은 동일한 단어(1370, 2회)를 20절에서는 권능으로 23절에서 능력으로 번역했다. 칼빈은 왜 선지자에게 능력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제시했다. 지혜와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 필력(筆力)에도 끝까지 힘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야구 투수의 구질은 초속/종속을 말하고, 초속과 종속에 차이가 적을수록 좋다고 한다. 힘은 그렇다. 동일한 언어이지만 힘이 있는 말이 있다. 지혜에 힘이 있어야 한다.
다니엘은 왕 앞에 나가서 주의 일을 밝히려고 결심한다. 왕 앞에서 소견을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계시의 지식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은 겸손과 예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례해도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13장). 다니엘의 입에 바벨론의 모든 술사들의 생명이 달렸다. 이런 막중한 언어를 가질 때에 지혜와 능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신중한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어도 기도하고 기도해야 한다. 응답을 받았어도 기도해야 한다. 일이 끝나기 전까지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한다. 일이 끝나면 다른 각도로 또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6.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배은망덕으로 빛을 부정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주의 빛을 비추며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주께서 영생의 진리를 주셔서 주님만을 찬양하케 하며 인정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열심은 오직 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찬양과 경배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
(칼빈 다니엘 주석 8 강) 다니엘 2:24-31
1. (24절) 다니엘은 이리옥에게 왕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도록 말했다. 그리고 왕 앞에게 나가겠노라고 말했다. 위급한 것이 발생하면, 그 위급한 사안을 본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결정자가 된다. 참호에 적의 수류탄이 떨어진 것을 본 쫄병은 수류탄 처리를 위해서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먼저 수류탄을 처리한 뒤에 과정을 보고해야 한다. 다니엘은 아리옥이 처형 집행을 중지시킨 뒤에 왕 앞에 나가 모략을 펼친다.
칼빈은 다니엘이 이번 기회에 바벨론의 마술사들을 처리할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도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우상을 척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도 부당한 방법으로 우상을 척결하는 것은 금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악한 자라도 정당한 이유 없이 처벌되는 것은 공의가 아니라 포악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포악을 정의로 처리한 것이다(롬 12:17-21).
2. (25절) 아리옥은 다니엘을 데리고 왕으로 나갔다. 아리옥은 다니엘에 대해서 소개했다. “포로인 유다 자손 중 한 사람”이다. 다니엘은 성급하게 왕 앞에 나가지 않았고, 며칠의 말미를 얻었다. 왕과 아리옥은 다니엘이 요구한 며칠의 말미를 허용했다. 그것은 왕의 위엄에 속한 것이고, 누구나 쉽게 왕 앞으로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포로된 유다 자손이 자기에게 해석한다는 것을 용납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절박한 심정이기 때문에 찬밥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닐 정도였다. 그래서 포로인 유다 사람의 모략을 듣고자 귀를 쫑긋 세울 수 밖에 없었다.
3. (26절).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벨드사살이라고 불렀다. 다니엘은 바벨론식으로 창시개명되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시다”이고 벨드사살은 “벨이 그의 생명을 보호할 것이다”(Bel will protect his life)이다. 바벨론에서 다니엘의 행정적 이름은 벨드사살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발언을 정리하면서 자기 이름을 반복하고 있다. 하나냐-“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Yahweh is gracious), 미사엘-“누가 하나님께 속하였는가?”(Who belongs to God), 아사랴-“여호와께서 도우신다”(Yahweh helps).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모든 박사에게 해결을 얻지 못해서, 자기가 굴복시킨 한 사람 벨드사살을 이용해야 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앞에 두고 반신반의한 상태이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 기명을 탈취한 정복자인데, 그 나라의 청년에게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니엘은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어도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칼빈은 정복자 느부갓네살의 무능과 나약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니엘이 이 문장을 기록했다고 제시했다.
4. (27-28절) 다니엘은 바벨론의 박사들이 꿈을 해석하지 못한 이유는 꿈을 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27절). 하나님께서 펼친 모략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 안다는 것은 부분적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생명을 선사하며 영혼을 강하게 한다.
칼빈은 바벨론의 박사, 술사 등을 제시하면서 미신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학문(true and genuine science)을 제시했다. 칼빈은 천문학이나 자연질서를 탐구하는 학문을 정죄할 수 없다고 했다. 칼빈 당대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가 활동하고 있었다. 다니엘서는 1561년에 출판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 천문학에 무지하다고 비평한 연구자(러셀)들이 있다. - 조덕영 “신학에 대한 러셀의 오해(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 칼빈은 천문학과 자연질서와 성령의 특별한 계시 지식(the peculiar revelation of the Spirit)을 구별한 것이다. 칼빈은 바벨론의 박수, 술객, 점장이들이 은밀한 하나님의 계시를 풀 수 없음이 당연한 것으로 제시했다. 자연에서 특별계시를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람의 능력으로 다다를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 도달하는 하늘의 신비이다. the doctrine of the Gospel is a heavenly mystery(고전 2:4). 바벨론 술사들이 꿈을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은 자연 현상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였기 때문이다. 20세기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가 꿈을 해석의 최고 전문가이지만, 그는 자기틀(Self-review Framework)을 가지고 꿈을 해석해서 자기틀로 귀결시켰다. 아무리 꿈을 해석해도 특별계시를 접근할 수 없다. 꿈 해석을 자기욕망 투사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도 ‘리비도(Libido)’로 제약시켜 버렸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나타내는 일을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비밀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비밀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과 계시 기록으로 충족하다. 하나님의 비밀은 진주처럼 빛나고 있다. 그 빛나는 진주를 말하는 것이 복음 전도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은밀한 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알릴 것이라고 밝혔다. 느부갓네살과 바베론 술사들은 다니엘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at the end or extremity of the days)에 될 일을 느부갓네살의 꿈으로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왜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주어서 후일의 일을 알게 하셨을까? 후일은 그리스도의 강림(Christ’s advent)이다. 예수의 현현은 세상 끝날이기 때문에, 종말의 시작이다. 당대의 최고의 정복자의 꿈이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오심(Christ’s kingdom)을 계시한 것이다. 다니엘은 유다의 귀환이 아닌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를 보았다. 그 과정을 느부갓네살의 꿈으로 계시했다.
칼빈은 느부갓네살이 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다니엘이 꿈을 말하면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꿈 진술의 진위를 알 수 있을까? 칼빈은 경청을 위한 겸손이 구비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꿈을 요구하는 느부갓네살 앞에서 담대하게 꿈의 내용을 말하겠노라고 진술하고 있다. 왕이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준 꿈을 다니엘에게 보여주었고, 꿈의 의미까지 주셨다.
5. (29절)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알려주신 분이 있다고 제시했다. 그것은 장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느부갓네살에게 준 꿈은 현재 일어날 일이 아니고, 느부갓네살 사후에 발생할 일들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먼저 느부갓네살에게 위로를 주었다.
6. (30절) 다니엘은 지혜가 바벨론의 술사들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그 분야를 해석할 수 있는 특별 은사라는 것을 제시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지식을 도외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 지식으로는 은밀한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전 1장). 전도자가 세상 지혜가 없어도 자부심이 있을 수 있고, 세상을 향해서 겸손할 수 있다. 다니엘은 두 가지 지식을 소유했다. 관리 능력은 자연 지식이다. 다니엘의 특징은 지식의 민첩성이다. 빠른 상황 파악과 대처 능력이 다니엘이 가진 능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특별 은혜는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다. 특별 은혜는 인간을 더 깊은 겸손으로 유도한다. 특별계시가 깊을수록 자연계시가 높아진다.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의 재능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알려주실 것임을 밝혔다. 그 꿈은 어떤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꿈으로 느부갓네살은 어떤 유익을 받았을까?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유익하게 하셨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궁금증을 해소하기만 원했고, 신자는 궁금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믿음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많은 학문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신뢰가 깊어지면 복되다. 느부갓네살은 꿈 해석을 들었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금신상을 섬기는 교만을 행한다(단 3장).
7.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무지한 사람과 다르도록 지성의 빛(the light of intellect)으로 감동을 주셨나이다.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인정하며 그 지식 안에서 경배합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성령으로 믿음을 강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독생자의 몸에 접붙여져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고 간구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게 하옵소서. 주님과 연합하여 주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주의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비춰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형람서원 고경태 螢藍書院 五恩 高炅兌 형설청람(螢雪靑藍), ex fide in fid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