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을 자들에게 들려주는 것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연구회 회원)

현대의 신앙교육에 있어 필수적인 고려(考慮)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자(audience) 혹은 독자(a reader)들을 고려하는 것이다.즉 듣는 자나 읽는 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양상은 일차적으로 교육의 방향이 피학습자를 지향하고 있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인데, 성경의 계시(revelation) 또한 인간을 향한 ‘적응’(accommodation)으로서 이뤄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적응계시로서의 성경의 특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적응성은 적응의 대상이 되는 인간과 같은 불완전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계시가 인간을 고려한 적응계시라고 할 때에, 그것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의미의 적응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거의 모든 성경들이 원본이 아니라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 대한 번역본들이다. 그러므로 논리상으로 보자면 모든 성경들이 번역상의 오류나 문체상의 오류 혹은 상이점(dissimilitude)을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서비평(Biblical criticism)이라는 것이 보편화 한 현대신학에서는, 가히 신학자들과 심지어 인문학자들에 의해서까지 성경본문이 사사로이 번역되고 해석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본들과 성경 원어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비평이 수 백 년 동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인본문을 대체하거나 능가하는 사본, 혹은 번역본을 산출하지 못하는 것 또한 성서비평을 바탕으로 한 현대신학의 엄연한 한계점이다.

이처럼 현대적인 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성경은 본문(text)일 뿐이기 때문에 사본들과 언어문법 등에 따라 얼마든지, 그리고 자유로이 분해하고 재조합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러한 비평적 작업에서 나지 않는 결론은 성경 외의 문화·역사, 그리고 인간 저자의 배경이 반영되어 도출될 수 있는데,그 최종적인 결말로서 “과연 본문 자체에 의미가 있는가?”라고 하는 해석학적 질문과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본문 자체가 완전한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본문이 현제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참으로 개혁된(reformed) 신학에서는, 성경의 완전성을 계시하신 분의 완전성 가운데서 이해한다. 즉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이기에, 그런 하나님의 완전성을 반영한 채로 우리에게 적응되어 주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자체의 주석이다”(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라는 성경 자체의 가신성을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이해의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일방적으로 계시(소위 ‘직통계시’로 오해하지 말 것)하신다는 자세로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신자들이나 학자(신학자)들이 동일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에, 성경은 교재(textbook or teaching material)가 아니다.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기록한 번역본이 아니라,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각 나라의 언어로 적응되어 번역됐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번역된 본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들으라!”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명기6:4절 말씀에서나, 막 4:3절에서나, 성경은 들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목회자로서나 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Christian)으로서 성경을 읽을 때에, 사실상 우리들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만 한다. 신학적 소견으로 이해하고 풀어내는 것은 차후의 일이고,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영혼의 귀를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5항은 언급하기를 “……성경의 전체적인 완전성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하는 논증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 생긴다.”고 했다. 또한 10항에서는 이르기를 “최고의 재판관은……성경 안에서(더불어)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어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들을 귀인데, 이와 관련하여 성경의 주님은 이르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진리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쉽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을 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바로 성경을 다루는 교사들의 자세다. 바로 그 점에서 박사가 들을 수 없는 말을, 아이(Paidion)가 들을 수 있는 것이니, 그처럼 외치는 자,빈들(The Waste Land)에서라도 외칠 수 있는 진리의 소리를 지닌 자라면, 그는 가르치는 자로서만이 아니라 외치는 자로서 더욱 분명한 일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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