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와 충동과 자기만족의 모순이란 죄악의 동기에서 벗어나라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국제신학교학장, 본헤럴드발행인,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재)본월드미션이사. 저서: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주기도문연구, 충성된일꾼되어가기. 등

(1)교회 절기로 말한다면 지금은 고난 주간이다. 특히 예수의 일생 중 한 주간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제자로서 따라가고자 자기 헌신과 순종의 드림을 특히 구별하는 시기이다. 예수의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 채워진 삶이다. 고난은 예수의 숙명인 것 같다. 예수의 삶 자체를 연구하면, 전체가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고난이란 거울로 볼 때 주님의 가치와 영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2)주님의 고난 중 가장 큰 고난은 하늘의 신적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사람이 된 것 그 자체가 고난이다. 거룩하시고 존귀한분이 낮아지고 낮아지신 것 자체가 고난이다. 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는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태어남의 장소도 말구유이다.

(3)그분의 삶을 살펴보면 고난의 삶이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형제들이 많아 늘 일해야 했다. 그리고 사역하는 동안 늘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자, 소외된 자, 마음이 상처를 받은자와 함께하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치료하셨다. 또한 짧은 사역 가운데 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최후의 고난을 선택하셨다.

(4)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을 짊어지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무엇인가 사회적인 지위와 대접받는 자리와 영광과 세상적인 복만을 추구한다면 제자로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포기할 것이 너무 많다. 포기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완전히 대가를 지불하고 살고 있다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런 의식 없이 적당히 믿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신앙은 보물을 얻기 위해 이 땅의 편안함과 대접의 자리를 끊임없이 기쁨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5)예수는 대제사장들의 시기와 충동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다. 시기심은 살인의 동기를 제공한다.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가? 그 이유는 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응답하시고, 자기 제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 시기심으로 인해서 동생을 죽였다. 모든 살인의 동기에는 시기심이 존재한다.

(6)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했다. 당신의 나라에서 내 자녀들을 좌우편에 앉혀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자 공동체는 아주 좋은 분위기였다. 믿음이 쑥쑥 자랐다. 문제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분위가 한순간에 살벌해졌다. 제자 공동체 내분의 동기가 무엇인가? 시기심이다. 시기심은 자신도 공동체도 다 파괴한다.

(7)대제사장들은 시골에서 근본도 없이 자란 사람이 유대인들의 스타가 된 것이 마음에 큰 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영광과 명예와 힘이 자신들에게 집중되어야 하는데, 제도권에서 벗어난 일게 갈릴리 촌놈에게 집중되는 것이 기분 상한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찬 것을 본다. 어떻게 하루 밤 사이에 다들 모여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것을 한순간에 모이하고 십자가에 죽일 것을 결론을 내었다. 낮이 아니다. 저녁부터 시작해서 새벽시간이다. 잠을 포기하고 그들은 한 마음으로 모여서 살인을 결의한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죽일려고 혈안이 되어 목요일 밤에 예수님을 체포하고 금요일 새벽까지 짧은 시간동안에 일곱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재판을 했다. 세상에 이런 재판은 인류역사에 전무후무한 첫 번째 사건이다. 단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무너질까봐 무리를 충동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8)대제사장들이 시기심과 사람들을 충동했다. 그리고 힘을 합해서 여론 재판을 한 것이다. 여론 재판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집행부의 의도대로 대중들은 따라간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오직 한 목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목 놓아 외쳤다. 이렇게 대중을 충동질한 여론 재판의 무시무시한 힘을 성경에서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충동 문화가 민족적인 분위기 속에 잠복해 있다. 과거 광우병으로 인한 촛불집회도 여론 재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경험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의 속마음은 같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만 모두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대중들을 충동질하여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다. 요즈음 한국 사회의 여론이나 기사들을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도대체 분별하기 참으로 어렵다. 시기심과 충동은 기독교적 가치가 아니다. 시기심과 충동은 자신도 파괴하고 다른 사람도 파괴하는 죄악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과 충동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9)주님의 고난은 다른 사람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 버려지는 고난이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막15:15) 말씀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면서 죄를 찾지 못했다.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재판을 끝냈다. 단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죄가 없지만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그의 재판에는 정의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고, 진리의 호소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다. 오직 만족을 주기 위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던져버린 것이다.

(10)신앙생활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자기만족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자기만족이라는 체면에 걸리면 더 이상 양심도 인격도 신앙의 성숙도 없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헌금하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찬양하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생각해보라. 그 결과는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탈진이나 배교나 배도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11)우리는 때로는 신앙생활하다가 자기 만족이라는 수렁에 빠질 때가 있다. 자기만족이 채워지면 열심히 하는데, 어느 순간 자기만족이 떨어지면 헌금도, 봉사도, 기도도, 기본적인 예배생활도 다 포기한다. 자기만족은 언젠가는 거품이 되거나 종교적 열심의 에너지 꺼져버리거나, 신앙의 감사와 기쁨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쉽다. 신앙은 자기 만족이 아니다. 자기 만족은 늘 자기가 기준이다. 기분 좋을 때는 한없이 잘하는데, 기분이 상하거나 여건이 힘들어지게 되면 포기하게 된다. 신앙은 내 기분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말씀에 비취어 보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는다. 그래야 견고한 신앙인이 된다. 그 기준점을 말씀에 기반을 두고 살 때 무너지지 않는다.

(12)사단은 아주 교묘하다. 나보나 나를 더 잘 안다. 내가 무엇이 약한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삶에 3가지만 조심하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다. 물질, 섹스, 권력(명예)이다. 사단이 돈에 약한 사람은 물질로 공격한다. 성에 약한 사람은 성적인 문제로 치고 들어온다.. 입이 방정맞은 사람은 입술로 찾아온다.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치고 들어와서 넘어뜨린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미투 운동의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13)빌라도는 무엇에 약했는지 사단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권력욕이다. 명예욕이다. 빌라도는 사실에는 관심 없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사단의 앞잡이가 된것이다.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인물로 역사의 기록 속에 영원히 남겨진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14)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함정에 잘 빠지는 경우가 있다. 자기기분과 자기감정과 자기만족에 충실하면 안된다. 이것은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기준이다. 그러나 청소년기를 지나고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자기가 기준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것이 어른의 모습이다. 사도요한은 신앙의 성숙도를 말하는데 어린이와 청년과 장년이 있다고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권면하였다.

고난주간을 통해서 우리는 한 단계 성숙의 자리로 향해야 한다. 인격이 자라고, 성품이 자라고, 생각이 자리고, 비전이 자라고, 행동의 거룩성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야 한다. 자라면시기, 충동, 자기만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직 예수님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라. 그 길만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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