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종교 관용령)을 반포하면서이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독교가 국가에서 인준된 종교가 되면서 박해 시대를 종료했다.

당시 기독교는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예루살렘, 에베소, 로마 지역을 중심으로 대교구를 형성하고 있었고 대주교는 알렉산더(Alexander Ⅰ of Alexandria, 250-328)였다. 알렉산드리아는 대표적인 기독교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 대교구(12교구)에서 으뜸 교구인 바우칼리스에서 장로로 활동했다. 아리우스는 ‘한 하나님’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예수를 영원해서 창조된 하나님으로 구별시켰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배격하고, 자체 회의를 열어 정죄했다(320년). 아리우스는 이에 불복하여 전체 제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당시에 시장에서도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의 논쟁이 회자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황제는 325년 5월 20일에 니케아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318명이 모였다는 전설이 있고, 참석하는 일체 경비와 수단을 황제가 제공했다고 한다. 황제는 개회사에서 “교회의 분열은 영혼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전쟁보다 더 나쁜 것”이라 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피조물은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다”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들인 예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보다 낮다고 주장했고, 알렉산더는 예수가 참 하나님이 아니면 구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니케아 공회의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은 배격되어 정죄되었다(Anathema). 그럼에도 아리우스의 일당들은 자기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대주교직을 퇴임할 때 아타나시우스(295?-373)에게 계승했다. 그러나 수 많은 모함과 공격을 받아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했다. 대주교직 46년 동안 20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70살 되던 해에 5번째 유배(365-366)를 당했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고, 아타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체(homoousion)을 포기하지 않았다. 니케아 신경을 파괴하려는 아리우스의 그의 일당들의 공격을 온몸으로 항거하면서 니케아 신경을 지켰다. 아리우스의 적극적인 항변으로 주교직에 복귀까지 결정받았지만, 주교 자리에 앉지 못하고 요절했다. 결국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을 반복하는 결정을 했다. 신경에 아나떼마가 빠졌는데, 필자는 저항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체임을 확정해서 더 이상 재론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수 신앙’과 ‘유일신 신앙’을 공적 문서로 체계화시켰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체를 결정”하는 니케야 공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어떤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체를 지킴”으로 공교회의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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