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다니엘 주석 15 강) 다니엘 3:18-25

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두 가지 정신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보호자가 되시며 그것이 유용할 경우에는 능력으로써 직면한 죽음을 모면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둘째 만약(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희생이 바쳐지기를 원하신다면 담대하게 두려움 없이 죽음에 임하겠다고 각오했다. 다니엘은 이 부분에서 자기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칼빈은 진리가 위해 당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담대하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기까지 헌신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제시했다. 칼빈은 1535년부터 망명자의 길을 가야했고, 그 힘든 길에서 이탈한 동료들이 많이 있었다. 칼빈의 절친이었던 틸레(Du Tillet)는 칼빈과 함께 동행하다가 다시 구교로 돌아가기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은 어둠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그 길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견딜 수 없다. 칼빈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수준으로 평가했다. 사람은 자기 생명 보존을 제일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생명의 위협에서 배교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배교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독교와 교회를 지키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위협에서 주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심을 굳건하게 붙드는 소수의 사람이다. 칼빈은 두려움을 벗어난다고 했는데, 두려움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 주의 성령께서 두려움을 이길 힘을 주신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순교자의 전형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김에서 떠나지 않았고 경건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가 받은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드러내어 영광을 돌리는 최고 수단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초가 된다. 경건에 실패하면 예배도 실패하며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2.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화가 난 느부갓네살의 어전(御前)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왕의 금신상에 절할 수 없음을 고백했다(18절).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자유롭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탐욕을 진리로 삼는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과 자녀를 훼방하고 박해한다. 칼빈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삶을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에, 육의 본성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영광과 헌신을 결단할 수 없다고 제시했다. 믿음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세상의 일을 극복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자녀가 순교를 각오하며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방안 외에는 없다.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며 필요하시면 건져내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며, 결코 자기 생명을 포기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결단을 해야 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에 의해서 이름을 개명되었지만 믿음까지는 바꿀 수 없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마땅히 징계로 바벨론까지 끌려오게 되었다. 그들은 잘못이 없을지 모르지만 유대를 징계하는 손길을 기쁘게 순응했다. 애굽에서 구원한 여호와께서 70년 뒤에 바벨론에서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not yet but will accomplish). 그럼에도 구원이 임하지 않을 지금에 여호와께 충성을 다했다.

4. 느부갓네살은 자기 앞에서 당당하게 진술하는 세 사람의 모습에 분노했다(19절). 그래서 풀무불의 강도를 7배를 높이도록 했다(19절). 칼빈은 느부갓네살이 풀무에 넣으라고 명령했을 때에, 세 사람이 기도하지 않았다고 제시했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풀무에 들어가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참고 행 12:5-8).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실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의 매우 무서운 명령에도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풀무 앞에 설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는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담담하게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의 탁월한 모습이다. 칼빈은 세 사람을 칭송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의 자태를 본받을 한 사례(an example for imitation)라고 제시했다. 죽음의 길을 담담히 가는 것이 참 믿음을 고백으로 영혼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왕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앞에서 당당한 자세이다. 세상 왕은 교만의 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의 왕으로 오셨고, 제자들에게 섬김에 으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 그 섬김의 도를 마지막 주일에 행함으로 결국 가룟 유다는 배신을 선택했다. 세상의 힘에 굴복하면 노예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하면 자유자가 된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신복이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반역자로 세 사람을 처단할 것을 결정했다. 그래서 자기 권위를 높이며, 하나님의 권위를 격하시키려 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죽음으로 믿음의 도리를 굳건하게 준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까지 겸손하게 순응했다. 바벨론에 패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일은 당하지 안했을 것이다. 유대왕과 제사장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기의 분깃에서 최선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한 모습은 느부갓네살의 분노를 7배가 높였다.

5. 사탄의 권능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크심은 역사에서 드러난다. 믿는 자가 사탄의 획책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실체이심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약속을 근거해서 행동한다. 인간 생의 구조는 언약적 구조에 있다. 하나님과 언약을 깨지 않은 것과 사람과의 약속을 깨지 않는 것이 신자의 생활양식이 된다. 그렇다면 결코 사탄의 획책에 넘어가지 않는다. 사탄의 획책에 넘어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관계를 깨는 것에 있다. 우리 시대에 이단에 넘어가는 대부분은 가족 관계를 깨는 것을 덕목으로 생각한다(딤전 5:8).

느부갓네살은 통치자의 위엄을 나타내어 정복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고 했다. 사람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은 폭력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가장 쉽고 빠른 통치 방법이다. 정복자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통치 기법이다. 일제강점기에도 폭력과 이간질로 36년을 지배했고, 그 후유증(後遺症)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6. 21절에 세 사람들의 옷을 입은 상태로 풀무에 던졌다고 자세하게 기술했는데, 칼빈은 그에 대해서 기술하지 않았다. 옷을 입은 상태로 던져진 것은 27절에 옷과 머리털이 그을리지 않고 나옴과 연결된다. 맹렬한 풀무불은 세 사람을 풀무에 던지려는 군사들이 근처에서 불에 타서 죽을 정도였다(22절). 결국 세 사람은 풀무에 떨어졌다(23절).

칼빈은 옆에 있던 사람들이 죽었는데(22절) 세 사람이 떨어진 것(23절)으로 제시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배신하고(계명을 어김) 생명을 유지하는 것보다, 죽음으로 구원을 기대하는 쪽을 택했다. 베드로 사도도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렸고, 감옥 밖에서 성도들은 집에 모여 기도했었다. 베드로 사도가 기도하는 처소에 도착했을 때 기도하는 무리들이 믿지 못할 정도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을 위해서 사역자의 생명을 주관하신다. 사역자에게 생명이 붙어 있음은 주의 일을 진행하라는 뜻 외에 다른 것이 없다.

7. 느부갓네살은 불에 던지려던 군사들이 불에 타 죽은 것을 보았다. 그런데 풀무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24절). 그런데 더 놀란 것은 세 사람을 던졌는데, 네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25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비상한 방법을 실행하셨다(여호와의 사자, 시 91:11, 34:7). 느부갓네살은 넷째 사람을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경탄했다(25절). 하나님은 이방인의 입술로 찬양을 받으신다. 착한 행실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것이 자녀의 능력이다(마 5:14-16).

8. 넷째 모양은 신들의 아들, 사람처럼 보였다. 천사가 보호한 것이고, 구약성경에서 천사는 성자의 현현으로 보기도 한다.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Logos asarkos)으로 보는 대표 구약 성경 본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로 부르는 용례로 멈췄다. 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칼빈에게는 엄격하게 성경 본문의 문법적 의미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엄격한 자세가 있다. 느부갓네살이 특이하게 사람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하나님들(복수형)의 아들”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9.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생명이 있음에 주를 찬양하나이다. 모든 근심과 염려는 주께 의탁하고 주의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가려합니다. 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시옵고, 의심을 버리게 하옵소서. 주를 위해 생명을 드리겠다는 것을, 세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서 고백하나이다. 고백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그래서 어찌되었든지 주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영광을 받으옵소서. 이러한 고백이 독생자의 피의 은혜로 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칼빈 다니엘 주석 16 강) 다니엘 3:26-30

1. 느부갓네살은 풀무 속에 있는 네 사람을 본 후 더 이상 세 사람을 풀무에 놓아둘 수 없었다(26절). 느부갓네살의 교만은 꺾이고 세 사람을 불러 나오게 했다. 세 사람은 풀무에서 왕의 명령이 없으면 나오지 않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규례의 신비이기도 하다. 풀무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풀무에서 죽지 않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존중하고 조정(approval and accommodation)하신다. 하나님께서 밥을 주시지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주지는 않으신다.

2. 잔인하고 교만한 느부갓네살은 순식간에 마음에 변화를 가졌다. 그 웅장한 정복자가 순식간에 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극찬했다(26절). 칼빈은 느부갓네살이 찬양한 것이 일시적이고 즉시 사라질 산물로 평가했다. 느부갓네살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그 신의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 왔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종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보지만, 자기 능력과 권세의 빛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마치 부자 청년이 주 앞에 나와서 영생을 구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명령할 때 근심하고 떠난 모습과 유사하다.

3. 느부갓네살은 금신상을 두라 평지에 세우고 모든 민족들이 경배하도록 통치했다. 그 계획이 세 사람의 신앙고백으로 좌절되었다. 그 분노가 잠시 사라졌을 뿐 정복자의 야망과 탐욕은 포기하지 못했다. 칼빈은 세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갔고(mortification),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vivification) 옮기셨다고 제시했다. 십자가를 짊(bearing the cross)에 대한 단호한 모습을 제시했다.

4. 다니엘은 세 사람이 풀무에 들어가는 현장에 바벨론의 방백, 수령, 도백, 모사들이 모여있음을 제시했다(27절). 많은 수가 모였다는 것은 바벨론 전체 의결임을 제시한 것이다. 느부갓네살을 포함한 모든 바벨론 지도자들은 풀무에서 죽지 않고 거니는 네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의 몸이나 머리카락까지도 그슬리지 않은 것까지 보았다(27절). 하나님께서 세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바벨론에 거주하는 어쩌면 금신상에 절했을 유대인까지 모두 안전하게 보존하셨다.

5. 느부갓네살은 다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했다(28절). 자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바벨론 70년 동안 유대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6.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정상적인 신앙고백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고백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이것을 강력하게 구분한 것이 교황주의이다. 개혁된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가 하나임을 고백하며,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를 분류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보일 자, 증인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존귀는 “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길 원한다는 고백을 듣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만을 고백하고 멈추었다. 결국 회개와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것이다.

7. 칼빈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이 회개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제시했다.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을 명백하게 보았으면서도 참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기적이 참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께서도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며, 요나의 표적을 제시하셨다. 표적으로 참 믿음을 얻을 수 없고, 믿음은 믿기로 작정된 자들에게 해당한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겸손하게 구할 수 있는 소양을 갖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그 놀라운 광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예수님을 신문할 때 헤롯이 호기심으로 대면하는 것을 기뻐하는 수준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기적이 경건을 돕는 수준에서 유익하며, 기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오히려 기적이 인간의 시야를 제한시켜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8. 느부갓네살은 자기 종교(이방 종교)에서도 기적이 충분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애굽의 바로도 술사들이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굳어져 모세의 기적을 부인했다. 애굽의 술사들은 모세의 표적을 제거하지 못하고 더 증진시켰음에도 바로는 적극적으로 여호와를 거부했다. 느부갓네살은 천사들이 기적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신들에게도 신의 사자들이 기적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을 불신으로 본다.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 외에 모든 것은 불신이다. 믿음의 대상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온갖 수사(修辭)를 다 하지만 결코 이스라엘 하나님께 들어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독교나 그리스도인을 칭송하기는 하지만, 결코 기독교로 들어오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세 사람을 책망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 자기 지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세 사람에게 빈틈만 있으면 바로 자기 불신이 드러날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감동을 주지 않았음까지 제시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에게 믿음을 구원받지 못할 자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는 것일까? 그 신비에 이르지 못하지만 신자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는데, 불신자들은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박해한다.

9. 느부갓네살은 결국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하게 대하는 자를 엄벌하겠다는 조서를 전국에 반포할 수 밖에 없었다(29절). 왕은 한 번 뱉은 말은 거둘 수 없다. 결국 포고문을 작성해서 전국에 반포해서 유대인의 종교 행위가 보장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이 포고할 수 밖에 없었다. 정복자의 위선과 허영 때문에 포고문이 반포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에서 높임을 받았다(30절).

10.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의 율법과 복음을 우리에게 날마다 가르쳐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주의 법도와 율례를 순종하며 지켜 주와 함께 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공의가 드러날 수 있도록 주의 자녀가 쓰임받게 하옵소서. 주께서 이방인에게 영광을 받으시며 주의 율례가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주 예수의 이름이 가득하도록 전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螢藍書院 五恩 高炅兌 형설청람(螢雪靑藍), ex fide in fi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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