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교회가 있게 한 말씀과 그 말씀이 2000년 동안 교회되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자유한 마음에 담긴 짧은 생각을 제한된 지면으로 옮겨 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보고 연구하지만 정작 그들이 믿는 것은 성경을 자의로 해석한 그들의 미드라쉬를 오직 믿는 것이다.

성서의 저자 및 배경 등을 문학적, 역사적, 사회적으로 열심히 연구하여 현대인들의 귀에 달콤하도록 성경을 '아름다운 이야기'로는 잘 전하지만 정작 성경이 말하는 교리의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 것은 21C 유대인의 믿음과 방불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성경을 도덕이성과 역사이성과 감정과 문화주의로 해석했던 칸트와 헤겔과 쉴라이에르마허와 리츨과 같은 20C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서 해석과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케에르케고르와 안셀름의 사상을 기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오직 계시'라는 모토로 계시의 오류를 핵폭탄처럼 고하면서 정통주의가 지녔던 교리적 경직성에 비판을 가하면서 신정통주의의 길을 열었던 바르트의 성서해석보다 더 낫다고 자부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의자 속의 스프링을 짓누른 만큼 진리가 성실과 정직으로 사회에 샘물처럼 스며들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고 미국 번영(뻥튀기) 신학의 영향으로 부풀려 있는 유사 복음(the almost gospel discovered)이 강물처럼 흐르기를 바라면서 흘러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그들의 거듭나지 않는 이성으로 만든 미드라쉬를 믿고 있는 데 그들의 경전인 성경(구약)을 믿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과 제3성전의 성전역사를 통하여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유사행위라고 볼 수 있다.

내 마음의 눈으로 설정한 이 정황이 현실이라면, 하나님이 폭풍을 던지고(cast down) 뱃사람들이 물건을 던지고 결국에 요나를 바다에 던졌듯이 다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전 초림을 지나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Come, O Lord!) 재림신앙을 고대하는 우리는 예수님 탄생 소식과 부활 소식이 예루살렘 성지에 살고 있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들려지지 않고 제사(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하층민인 목동들과 가장 소외층이었던 막달라 마리아와 버림 받은 땅 갈릴리 출신의 어부 베드로에게 들려졌는지를 깊게 묵상하여 그 뜻을 헤아리는 것이 다시 오실 부활 주님을 맞이 하는 모델의 다섯 신부같은 거룩한 태도가 아닐런지, 부활의 아침 상념(想念)의 질문을 심상(心像)에 던져 본다.

더불어 당시 최고의 문명도시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삶의 자리인 가나안 성안에 거하기를 거절하고 삶의 터로 부적절한 네게브 사막(브엘세바)에서 베두힌처럼 천막치고 산 의도를 알고자, 자의(自意)를 누루고 부활이전의 겟세마네 질문으로 추동(推動)하여 본다.

이렇게 체화(體化)되지 않은 믿음을 부활의 아침에 묻고 추동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이스마엘을 끌어 안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다른 꿈인 동상이몽(同牀異夢)을 가짐으로 헤메었던 세월과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순종했던 40일의 정탐이 40년이라는 크로노스 세월로 흘렀기 때문이다.

오늘 질문이 주님의 성실과 정직으로 보호되어 부활과 영생의 상징인 '빈무덤'이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의 '빈무덤'이 되기를 바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빈무덤')을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 찬송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29,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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