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자락, 베드로 마을(두터운 바위 마을, 厚岩洞), 양선교회(Goodness Church), 이맹영목사.

미국 크리스찬 투데이 우수 도서로 선정된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공저『 20세기 신학』을 읽고 가톨릭 신학의 두 거성인 칼 라너와 한스 큉이 주장한 인간 정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중심으로 그 후기를 써 보았다. 

전5:2b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용어인 內在性(immanence, 시139, 롬1:20)과 超越性(transcendence, 사6:1, 롬11:33-36)을 적합하게 표현한 구절이다. 바르트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다”라고 말하면서 절대계시를 주장하였다. 이 두 용어는 신 중심시대였던 중세 때는 초월성을, 인간 중심시대였던 계몽주의 시대 때는 내재성에 기울다가 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그 기울기에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성 중심의 입장에서 철학적으로 신학을 질문하고 사유한 19C 신학자 칸트, 헤겔, 슐라이어마허, 리츨 등의 신학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의 부조화는 이성으로부터의 출발이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다. 

본 장에서 살펴 본 20C 신학자 칼 라너와 한스 큉도 나름 그 방법론을 발전시켜 보았지만 그 당시 바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던 키에르케고르는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철학(이성)인가 신앙인가?" 라는 물음에 그 답이 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용어로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려 했지만 그들의 용어가 신앙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학문적인 용어여서 유한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내재성과 초월성에 관한 주장은 마치 신비와 믿음의 영역인 삼위일체 교리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이들의 주장이 설 수 없는 것은 신앙과 이성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성은 거듭나지 않은 이성을 말한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이성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편에서 신의 내재와 초월은 불가한 역사다. 다만, 초월을 알 수 있는 조건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시간 속에 오신 신(God-in-time), 즉 성육신의 역사적 계시를 믿는 것이다. 오직 신만이 진리를 아는 조건과 진리를 인간에게 줄 수 있고, 그 이성은 주 예수로 거듭난 이성이어야 한다. 

헤겔이 절대 정신과 절대 이성을 강조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였다면, 이들은 그 범주의 테두리에서 나름 그 방법론을 제시했을 뿐이다. 이들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주장은 마치 16C 이황의 이원론적 인간관(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이이의 일원론적 인간관(아리스토텔레스)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이 배제된 학문으로 머문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즉 유대인들이 성경을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인 성경은 믿지 않고 그들의 생각으로 만든 미드라쉬를 믿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범신론이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주의도 아니며, 초월이나 신을 하나의 가설이나 이론으로 여기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신은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인격이며 실재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은 치우친 기울기를 특히 중세적인 가톨릭에 강하게 시사한 점과 그 대화를 펼칠 수 있는 신학의 장을 연 것이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편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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