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광신대 신학과 3년)

고은(광신대 신학과 3년)

1600년대 유럽은 대혼란의 시기였다. 영국의 혼란은 소득이 있었던 갈등이었던 반면 유럽 대륙의 혼란은 무익한 비극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100년이 지나자 유럽은 북쪽의 기독교와 남쪽의 로마 가톨릭으로 양분되었다. 두 종파 간 갈등이 결국 폭발한 것이다. 한 광신적 군주가 등장하자 역사상 참으로 잔혹하고 쓸모없는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1618년에 시작한 ‘30년 전쟁’이다.

30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공작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비롯되었다. 1617년 그는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1618년에는 헝가리의 왕이 되었으며 1619년에는 산산이 쪼개진 독일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문제는 예수회 교육을 받은 그가 순수한 로마 가톨릭 신자의 수준에서 벗어나 무자비한 광기의 군주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중부 유럽 일대를 지배하게 된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자기 관할 지역에 개신교도가 더 많은 것을 알고 경악했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거나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독일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협약을 통해 개신교(루터파)가 용인되어 정착한 상황에서 광기 넘치는 황제는 조약조차 무시했다. 예수회에 세뇌된 그에게 개신교는 혐오스런 이단에 불과했고 “프로테스트”는 반역도로 판단했다.

1618년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프라하에 두 명의 사신을 보내 그곳 백성들에게 개신교가 불법이라고 선포하고 모두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200년 전 개혁자 얀 후스를 지지한 이래 개혁적 성향을 고수했던 보헤미아 주민들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프라하의 개신교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황제가 보낸 특사 두 명을 약 17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를 “프라하의 창문투척 사건”이라고 부른다. 고층에서 떨어졌으나 왕의 두 특사는 기적처럼 거름더미에 떨어져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보헤미안들은 아예 페르디난트 2세를 거부하고 개신교도를 새 왕으로 선출해서 추대했다. 이는 라인 강 유역 팔라틴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였다. 반란으로 판단한 페르디난트 2세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많은 요인들이 얽히며 각국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무려 30년이나 지속했다. 비극적이고 지루했던 ‘30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는 보헤미아 백성들을 무수히 학살했다. 끝까지 저항했던 신교지도자들은 프라하 다리에 모두 목매달려 처형했다. 보헤미아가 초토화되자 황제는 개신교를 제거할 수 있다는 더 큰 자신감을 얻어, 헝가리의 개신교도들까지 정벌을 목표로 삼았다. 헝가리까지 황제의 살육행진이 진행되자 동부 트란실바니아의 영주 베틀렌 가보르는 개신교도를 보호를 위해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한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 군대에게 도움을 청했다. 헝가리의 특사가 이스탄불까지 방문하자 술탄은 6만 명의 이슬람 기병대를 보내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를 저지시켰다. 물론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 관할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원군을 보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군대가 헝가리의 많은 개신교도들을 구원한 셈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번에는 독일 북부에 거주하는 개신교도들을 없애기로 결심하고 오스트리아 군대 외에 스페인에 군대 요청해서 증원했다. 수많은 독일 농민들을 프로테스탄트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살육을 당하며 멸절의 위기에 놓였다. 이에 개신교 국가들은 자구책으로 연합군을 만들어 대항했다. 특히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페르디난트 2세의 북진을 막고 개신교 수호를 위해 거병을 했고 영국 왕 제임스 1세도 덴마크에 지원병을 보냈으며 독일의 개신교 영주들도 합세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기계” 발렌슈타인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기독교 연합군에 맞서게 했다. 30년 전쟁 초반에서 “발렌슈타인의 군대”, “로마 가톨릭 군대”, “합스부르크 군대”, “신성로마 군대”, 또는 “오스트리아 군대”는 사실상 모두 같은 군대를 지칭했다. 신성로마의 발렌슈타인과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사이의 대전은 덴마크의 대패로 끝이 났고 크리스티안 4세는 퇴각하였다. 승리한 발렌슈타인은 가톨릭의 측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등장으로 로마 가톨릭 군대의 독일 정복과 대륙에서의 개신교 축출이 가시화되는 듯 했다.

1630년 개신교의 최대의 위기에 있을 때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가 나섰다. 그는 17살에 왕이 되었으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분열된 스웨덴을 통합하고 덴마크 간섭을 종식시켰다. 러시아전에서도 승리한 맹장이었다. 구스타프 아돌푸스가 30년 전쟁에 참가한 이유는 경건한 루터교신자로서 개신교도들을 구명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구스타프 2세가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유럽 본토의 수많은 개신교도들은 무참하게 학살되고 구교로 전락했을 것이다.

스웨덴 편에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서게 되었다. 프랑스는 로마가톨릭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에서 개신교 편을 들었는데 이는 숙적 오스트리아가 확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는 훌륭한 장비로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했다. 그는 유럽에서 최초로 군대에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무늬 군복을 입힌 지휘관이었다. “전쟁영웅” 구스타프의 군대는 “전쟁천재”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드디어 조우를 했고 구스타프의 군대가 연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전시 상황은 역전되어 스웨덴 군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인근까지 진격했다. 오히려 개신교 국가들의 승리가 거의 굳어진 듯 보였으며 구스타프는 영웅이 되었고 발렌슈타인의 명성은 추락했다.

구스타프 왕은 열세에 몰린 합스부르크 군대를 아예 궤멸시키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했다. 1632년 겨울 독일 중서부 뤼첸에서 30년 전쟁 중 가장 중대했던 ‘뤼첸 전투’가 벌어졌다. 양 군대의 엄청난 총포 교환이 있고나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전장에는 자욱한 연기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바람에 연기가 걷히자 전사자들로 가득한 들판이 드러났고 그 중에는 총탄에 맞아 사망한 구스타프 국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웨덴 군대는 국왕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전투를 지속했고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후퇴했다. 스웨덴은 승리했지만 가장 뛰어난 구스타프 2세 왕이 숨져 한편으로 더 큰 손실을 입었다.

발렌슈타인도 개신교 군대와 타협을 모색했다가 신성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실 발렌슈타인은 초기에 개신교였다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헤미아의 왕이나 큰 영주 자리를 기대하고 전쟁에 참가했지만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구스타프는 신앙을 위해 싸웠고 발렌슈타인은 부귀를 위해 싸웠다.

다시 오스트리아 군대는 회복되었고 전쟁은 소강 상태에 빠졌다. 이 종교전쟁은 후반부에 이르자 비정한 영토 분쟁과 세력 다툼으로 바뀌었다. 뤼첸 전투 이후로도 16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종반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 연합군이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640년이 되자 30년 전쟁을 시작한 초기의 왕들도 장군들도 병사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다시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지만 각 나라들은 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조차 망각한 채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마침내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유럽 각국은 조약을 맺고 휴전했다. 참으로 끈질긴 프랑스와 스페인은 마지막까지 화해를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버렸으나 스페인의 피해가 훨씬 컸다. 반대로 프랑스는 알자스를 얻는 실리까지 챙기며 1600년대 최강국이 되었다. 독일 북부는 다시 개신교 지역으로 존재하여 프러시아 국가를 출발했다. 무엇보다 30년 전쟁을 마감할 때 각국이 맺은 조약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허무하게도 그저 30년 전쟁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전 상황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cuius regio, eius religio). 어느 진영의 우월적 승리도 없었기에 원해 개신교 지역은 개신교로 또 로마 가톨릭 지역은 로마 가톨릭으로 지내자는 합의였다. 결론적으로 30년 전쟁은 그토록 지루하게 싸워야 할 필요도 없고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무익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전장의 중심지 보헤미아는 초토화되어 수많은 난민들이 생겨났고 다수는 ‘집시’가 되었다. 독일 인구는 1800만에서 1000만으로 줄어들었고 마을들은 황폐화되었고 논밭은 피폐해졌다. 굶주린 아이들과 남겨진 고아들 사이로 늑대들만 울어댔다. 전쟁 이후 떠도는 군인들은 강도떼나 다름이 없었다. 재난들은 함께 오듯 가뭄과 기근, 역병까지 같이 발생하여 산자나 죽은 자나 모두 비극이었다.

유럽은 30년 종교전쟁의 참화를 절실히 느꼈다. 30년 전쟁은 유럽의 역사에서 일어난 마지막 종교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내적 반성을 가져와서 자유와 관용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반성을 가져왔고 자유와 관용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두 그룹이 출현하게 되었다. 하나는 교리의 폐쇄성을 배격하고 체험과 사랑을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자들이었다. 또 다른 그룹은 광기와 독선을 비판하고 이성적 세계를 구축하려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었다.  <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김동주)를 근거로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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