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5:10-14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시리아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을 나병이라는 끔찍한 병이 괴롭혔다. 아마도 그는 그 병을 낫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 소녀가 그에게 소망의 말 즉 그가 변화될 수 있다는 복음의 메세지를 전해주었다.

나아만 장군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그러나 정말 치유받고 싶어서 진실로 그의 육체의 변화를 체험하고 싶어서 그 소녀의 말을 의지하여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 앞에 나와서 자기가 치유받아야 할 부분에 손을 흔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예의도 없이(?) 그에게 얼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종을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면 깨끗해 질 것이라는 메세지만 간단히 전해줄 뿐이었다.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자 나아만은 몹시 화가 났다. 그의 자존심을 엘리사가 건드리자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를 고쳐주면 크게 보상을 하려고 선물도 잔뜩 준비해 갖고 왔는데,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종을 내보낸 것이다.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온 것이 아니라, 엘리사라는 사람을 통해 무언가 기적을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몹시 화가 난 나아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자기 주관이 매우 뚜렷하며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며 듣지 않는 교만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나아만처럼 치유집회와 영성집회를 따라다니며 어떻게 해서든 영육간의 병을 고쳐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나아만처럼 자기가 기대했던 상황이 아니면, 자기가 찾아가놓고는 오히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식으로 돌변한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이 나아만처럼 "내 생각에는..."이라며 자기 생각만 옳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엘리사 선지자는 왜 시리아의 군대장관이 찾아왔다고 하는데 그를 맞으러 나가지도 않았을까? 이것이 오늘날 치유의 은사가 있다고 하는 이들과 엘리사의 다른 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늘날 수많은 치유 은사자들이 앞다투어 광고를 하며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불러 모은다. 또한 교회들도 그러한 은사자들을 초대하여 은사집회 또는 치유집회라는 타이틀의 집회를 많이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하지만, 정작 중요한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뒤로 하고 치유자나 교회의 이름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이나 복음보다 자신의 이름과 교회가 알려져서 명예와 부흥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달랐다. 그는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그를 치유하고 변화시켜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칭찬과 명예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아만이 기대했던 어떠한 주술적인 일을 하기는 커녕 아예 얼굴도 내밀지 않았던 것이다.

육체의 치유를 기대했던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그의 교만한 영혼까지 치유해주고 싶었기에, 일개의 선지자가 시리아의 군대장관에게 명령을 했던 것이다. 나아만이 그 말을 순종하면 치유받을 것이고 그의 교만이 치유되지 않으면 그의 육체도 고침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육의 사람인 나아만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나아만 장군에게 그와 함께했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라고 권면하자, 자기 생각을 주장하던 나아만은 그들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깨끗함을 받게 되었다.

조금 전에 자기 생각만 주장하며 화를 내던 나아만 장군이 그의 자존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종들의 말과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한 순간, 그는 그가 그렇게 소망하던 육체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14절을 보면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내려가다"라는 말은 사마리아가 지대가 높기 때문에 요단강으로 내려갔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으나, 군대장관이 일개의 선지자의 말에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이 치유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낮아져라",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 "철저히 회개하라" 등의 말씀을 들을 때, 기분이 나쁘다고 분노하지 말고 나아만 장군처럼 스스로 낮아져서 내려가야만 한다. 우리의 교만이 치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열왕기하 5장1절을 보면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라고 나아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이처럼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저는 어느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가이지만, 문둥병자입니다"라고 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문둥병"이라는 영혼의 고질병에 걸려있으나, 그것을 인식하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정작 문둥병에 걸린 자신의 영혼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씻어야 나을 것이라는데 동의하여 요단강으로 가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막상 요단강까지는 가더라도 일곱번 즉 완전히 변화될 때까지 씻는 이들도 많지 않다.

에베소서 5:3-8은 우리가 과거에는 어두움이었으며 그 어두움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예수께서는 우리의 속에서 다음과 같은 더러운 것들이 나와서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우리는 이처럼 영혼의 문둥병에 걸려서 문둥병의 현상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자기 주관과 교만과 열등감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반응을 보는 순간, 나아만 장군처럼 화를 내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무시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므로 영혼의 문둥병을 치유받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강퍅함을 버리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령의 사람과 육체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이들은 죄의 맛을 습관적으로 맛보며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은 죄를 즐긴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미 습관이 된 어둠에 속한 언행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라고 지적해주는 이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나아만처럼 분노하며 습관적인 죄에 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에게 즉 하나님께 참람한 죄를 저지른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지적해주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의 말을 매우 듣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영혼의 나병이 너무나 깊게 뿌리를 내려서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엘리사 선지자는 매우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처럼 회개는 매우 쉽고 간단하다. 그냥 순종하면 된다. 7번 씻으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순종이 어렵고 일곱번 즉 완전히 순종하며 완전히 씻기 위해 철저히 낮아지며 회개의 자리에 나아간다는 것이 어둠에 속한 이들에게는 너무나 화가 나며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지각이 없는 인간들 즉 자존심(열등감)이 강한 인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이 지각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생각했던 방법이 아니면 절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귀를 막아버린다. 자신이 모든 방법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구원받는 방법까지도...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 58:4-5)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리고 그 자존심을 버리지 못할수록 하나님과 가까와진다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존심이 먼저 요단강에서 일곱번 씻김을 받아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우리는 그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결단을 수백번 수천번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단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가중할 뿐이다. 결단하고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단하려고 하지말고, 교회에서 결단을 시키려고 하지 말고 주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해야만 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밑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때 마르다의 지적질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수많은 교인들이 거듭난 줄로 착각하며 마르다처럼 분주하게 교회를 다니며 다른 지체를 지적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마리아처럼 말씀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래서 치유를 받을 수도 없고 거듭날 수도 없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복을 받기만 바라며 교회를 다닌다. 내면으로는 진정으로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주여, 주여"하며 소리는 너무나 잘 지른다. 교회의 모든 일에 절대로 빠지지않고 모두 잘 참석하며 열심을 다하는 자신의 종교생활을 보면서 자신의 온 영혼이 문둥병으로 냄새가 나며 썩고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때로는 나아만처럼 병이 있고 그 병을 고쳐야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한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한다.

그런데 나아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기보다 낮은 종들의 말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이스라엘까지 찾아갈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으며 요단강에 스스로 씻으러 가서 일곱번 즉 완전히 자신의 문둥병에 걸린 온 몸을 씻으므로 비로소 그의 온 몸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그는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어른의 살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나아만이 무엇을 느꼈을까?

[적용]

진정으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지금 나의 영혼의 문둥병은 무엇인가?

내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내가 가장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이나 자긍심은 무엇인가?

왜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평소에 내가 무시해왔던(내 생각이나 지식이나 체험과 다른) 성경말씀과 주의 종을 통해 하신 말씀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나는 다른 이들의 의견이나 생각들이 내 생각과 내가 알고있는 지식과 경험과 다를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또 내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아만의 나중 반응처럼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나아만의 처음 반응처럼 자존심이 상해서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화를 내고 무시하는가?

나의 자존심을 건드려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에 따를 수 있는가? 

주 안에서 죽은 이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늘이라고 하는 평생을 이제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자존심을 내세우며 살지말고 주안에서 우리의 모든 자존심과 영혼의 문둥병이 치유함을 받아서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새롭게 변화된 자신을 체험할 때까지 구하고 두드리고 찾자.

[기도 제목]

1) 혼과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2) 저에게 영혼의 문둥병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치유해 주심을(치유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3) 나아만 장군처럼 자긍심과 자존심이 저에게도 걸림돌이 될 때가 많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내려놓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제 스스로 저를 부인하기가 싫고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저를 자랑하고 싶고 명예를 얻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하오니 성령께서 저를 온전히 주장하여 주셔서 저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4)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도, 주의 종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일지라도 제 생각과 지식과 가치관과 경험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모든 견고한 진들이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밑에 겸손히 꿇게 하시고 잠잠히 주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5) 그 동안 저에게 사랑의 충언을 해준 수많은 이들을 무시했던 것을 생각나게 해주셔서 그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며 저의 교만함이 치유받게 하여 주옵소서

6) 자존심(열등감) 즉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뱀의 거짓말에 속아서 살아온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요단강에 일곱번 씻을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7) 나아만 장군처럼 저의 영혼의 문둥병이 온전히 깨끗함을 받아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거듭난 새피조물이 되어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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