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저는 경기도 광주시 광주성결교회를 섬기고 있는 조완호 집사입니다. 목표를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60여년의 세월을 잠시 내려놓고  조용히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삶의 굴곡이 심해서 평범한 분들과 비교해 보면 삶의 길이가 서너 배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마다 저와 제 가족을 건져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저의 표현이 부족하지만 서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1952년생, 충남 서산 출생,서울공업고등학교 졸업, 유원건설 자재부 근무, 천호텍스피아 수출업무 담당, (현) 상업용 건물 시설관리 업무

부도 이후에 기도원에서 몇 주간을 보내고 다음은 신림동의 고시촌에서 한 달을 지냈다. 그곳에서 한 달 만 쉬고 무슨 일이든 하기로 했다. 그 곳 주인한테는 조용히 글 을 쓰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고 먹고 노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쉬고 싶었다. 날마다 돈 때문에 피를 말리다가 돈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니까 오히려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가 없었다. 사업장이 부도 난 것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는 가족도 잊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조건 쉬고 싶은 마음뿐 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때는 김포 공항 시대였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들어오는 비행기들이 관악산 부근에서 착륙 준비를 하고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모든 비행기를 바로 밑에서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낮에는 2, 3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지루할 틈이 없었다. 

국제선 비행기!
 내가 군에서 전역하고 6개월 후에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 할 때도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갔었고 섬유회사에 다니면서도 국제선을 타고 출장을 다닌 경험이 있는데 이제는 영원히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갈 일이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국제선 비행기가 너무나 그리워졌다. 나도 그 이후에 교회에서 몇 번인가 국제선 비행기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다. 
 사람이 배고플 때에 주머니에 돈이 있는 사람은 단순하게 배만 고프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는 사람은 배고픔 보다는 서러움을 먼저 느낀다! 가능한 환경에서 참는 것은 단순히 참으면 되지만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환경이 되었을 때에 오는 실망과 좌절감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내가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탈 때는 신원증명서와 국세 및 시세 완납증명을 첨부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지명 수배자다. 금융거래도 신용 불량자다. 국세도 미납자다. 무엇보다도 외국에 나갈 이유도 없고 돈도 없다. 국제선 비행기 타고 외국에 나갈 일은 이제 영원히 없겠구나 하고 생각 하니까 서글펐다.  신림동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비행기는 참으로 높아만 보였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귀하게만 생각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한 것으로 생각 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생각도 못 한 일로 인해서 신림도 고시촌에서 나온지 4년이 지난 다음에 외국출장을 다니도록 허락 했다. 처음 출장은 중국 이었다. 그 때까지도 지명수배는 풀렸지만 국세가 미납이 있어서 일주일 전에 목동의 출입국 사무소에 직접 가서 내가 출국 할 수 있는지 확인을 하고 공항으로 갔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해서 약간의 긴장은 있었으나 모든 출입국 절차를 무사히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은 한없이 기쁘고 감사의 기도를 했다. “주님 감사 합니다!”
 그런데 갈 때는 일행이 있었고 돌아 올 때는 혼자서 돌아오는데 중국의 광조우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는 도중에 출입국 직원이 나의 여권을 받고는 인터폰을 하더니 나보고 한쪽으로 비켜서라는 손짓을 했다. 순간 또 긴장이 되었다. 무슨 일일까? 중국어는 한마디도 못 하는데 여권은 압수당하고 나는 비행기를 못 탄다고 생각하니까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잠시 후에 2층 사무실에서 한사람이 내려오더니 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 밖에 나를 세우고 잠시 들어갔다 나와서는 아무 말없이 나에게 여권을 돌려주면서 탑승구 쪽으로 가라고 했다. 언어가 통했으면 물어 보았겠지만 언어가 안 되니까 지금까지도 그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내용은 모르겠다.

김포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상일동전철역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는데 그 중간에 교회가 있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교회에 먼저 들려서 감사의 기도를 했다. 나의 기도는 출장 내용과는 상관없이 오직 나의 평생에는 전혀 불가능 하다고 생각 했던 외국 여행을 이토록 일찍 허락해 주셔서 감사 하다는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교사 모임에서 중국에 출장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주님! 너무 너무 감사 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은 욕심을 갖지 않겠습니다.”  

단순히 국제선 비행기를 타는 것만도 감사지만 그 보다는 내가 했든 섬유 일을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어서 무한 감사였다. 섬유회사의 직원으로 출근은 하지만 기분은 대기업의 간부급이 부럽지 않은 기쁨과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회사 업무를 이전보다 더 열심히 했다. 얼마 후 출장부터는 인천공항을 이용했다. 또 한 동남아 출장 때는 진주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았던 그 진주 호텔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유명호텔을 여행하면서 무역 상담회도 하고 수출영업도 했다. 영원히 불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 들이 빠른 시일 안에 회복 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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