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미국 교회를 분석한 것이다. 호튼은 미국 교회에 “그리스도가 없는” 여러 현상을 제시했고,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강한 경고를 주었다.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책을 집필해서 유사한 내용을 경계하기도 했다.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미국의 실용주의에 근거한 여러 상황을 제시하며 분석하여 경계를 주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잘못된 기독교의 모습을 지시하며 경계를 주었다. 충격적인 제목이 기독교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에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에 어찌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말이 나왔는가에 대해 미국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가 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공백 상태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온갖 종류의 옷을 입혔는데, 정작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 최종 목표가 우리로 삼았다. 미국 실용주의를 신학화하여 토착화시켰다고 생각해 보았다.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김성웅 역, 부흥과 개혁사, 2009년.

마이클 호튼이 제시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유형은 “찰스 피니의 펠라기우스주의(도덕적이고 심리치료적 이신론)”, “조엘 오스틴의 형통복음”, “이머징 교회 운동”, “영지주의 영성”이다. 첫째,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는 미국의 부흥 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인데, 호튼은 이신론에 근거한 심리적 요법으로 종교적 열심을 유도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대적하여 정죄된 펠라기우스주의로 평가했다. 펠라기우스의 주요 주장은 원죄를 부정하고, 구원에서 자력구원을 주장했다. 그리고 심리학을 기초로 내면의 상태를 기계처럼 조작해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 부흥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호튼은 복음의 현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견해를 이단으로 평가했다. 둘째, 조엘 오스틴은 <긍정의 힘>으로 미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남긴 사람이다. 잘되는 나에 대한 집중을 추구함으로 자아도취적인 망상을 만들도록 했다. 이러한 유사한 책을 “끌어당김의 법칙” <시크릿>이라고 생각했다. 조엘 오스틴의 형통복음에 나타나는 자아도취와 개인주의의 한 유형이고, 구원을 가져오는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 삼는 자력구원과 유사하다. 셋째,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에 대한 비판이다. 이머징 교회는 기존의 교회 형태를 탈피한 새로운 교회를 창안하는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운동이다. 기독교는 복음과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호튼은 이머징 교회를 복음을 강조하면서 율법을 부정하는 형태로 분석했다. 형식없는 교회에 대한 도전은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의 산물로 평가했다. 넷째 영지주의 영성이다. 도덕주의가 펠라기우스 이단으로 갔다면, 열광주의는 성경에서 심각하게 경계를 주었던 영지주의로 간다.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섞으려는 시도였다. 영지주의의 목표는 영적인, 천상적인 그리고 신적인 연합에 이른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실천의 행동으로 영지주의는 신비한 영성의 사다리를 오름으로써 기독교를 변절시킨다. 영지주의는 인간 자신의 내면적인 자아 자체가 신이라고 주장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도덕주의는 결국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영지주의의 내면의 영성 운동도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에서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는 동일하다.

참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전도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말씀(복음선포)과 성례를 통해 은혜를 전달되는 장소이며, 받은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통해서 신자와 비신자들 모두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복음)을 듣게 된다.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 중심적 생활을 주장해서 청년 때에 자기 삶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성경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을 듣는 자는 복음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 없이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선사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교회의 은혜의 수단을 부정하고,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앙과 행위의 중심이고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은 고대 교회의 원시적인 단순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종교개혁은 인간 중심으로 형성시킨 로마 가톨릭에서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개혁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읽으며 느낀 점은 미국이나 한국 교회가 복음을 멀리하고 인간 중심으로 가는 것이 같다는 것이다. 마이클 호튼이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일치감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호튼은 많은 철학자들과 인문학자, 사회학자들을 비판한다. 인간의 탁월한 생각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미치지 못한다. 인간의 탁월한 생각은 사탄의 역사의 산물일 수도 있다. 교수님의 강의에서 철학은 귀신의 학문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 있는 기독교”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흥행하고 발전하는데 반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민철(광신대 2년), 고은(광신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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