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 목사, 본헤럴드 호주 특파원, The University of Sydney. Ph.D. (종교학)   저서 - 한국 기독교와 문화 : 한국 교회의 하느님. 하나님 이해 (신성출판사, 2014)

최근 여러 모슬렘 국가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에 대해 더욱 배려와 존중하는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이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개신교도 강도의 차이일 뿐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많은 개신교도가 단군상을 파괴했고, 불상을 파괴했던 지난날의 한국 개신교 역사를 볼 수 있다. 지금은 개신교도들이 불상 파괴하는 것은 거의 줄어 들었지만 다른 측면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 배려와 존중을 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이 글을 쓰려는데 갑자기 얼마 전에 한국의 00 대학에 강사를 하던 사람이 “아리랑” 관련된 책이 잘 팔려 큰일이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 떠오른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리랑” 관련된 책이 잘 팔려 큰일”이라고 하는 그런 사고로 교회나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자체가 더 큰 일이고, 그런 사고로 페이스북이나,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반대로 생각하면 금방 해답이 나온다. 다른 종교인들 처지에서 보면, 그 강사가 쓴 레위기 관련된 책이나 신명기 해석에 관련된 책이 잘 팔리는 게 큰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강사가 쓴 책이 모슬렘, 힌두교인, 불교도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의 종교법, 제사법과 전혀 달라서 다른 종교인 측면에서 보면 그 강사의 책이 잘 팔리는 게 당연히 큰일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종교적, 신학적, 교리적 관점에서 다른 종교나 저작물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배타적 논리로 기독교를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고 더 큰 일인 것이다. 한국 교회가 ㄱ독교 소리를 듣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지나치게 개신교 교리적 시각에서 배타적 자세로 다른 종교나 저작물에 대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개신교 교리적 차원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복음주의적이고 성서적이라고 잘 못 해석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교회나 학문의 전당에서 이런 식의 가르침이 있을 때, 또는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이런 식의 배타적 글이 늘어날 때 잘 못 배운 크리스천들이 다른 종교 불상이나 불교 문화, 단군상을 파괴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셈이 된다.

다른 종교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저작물에 대해 배타적 자세를 취하는 기독교인에 대해 유명한 헬무트 리처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라는 학자는 가장 위험하고 미성숙한 그리스도인 부류로 나누고 있다. 즉, 니버(Niebuhr)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기독교인들과 배타적 이해에 대해 5가지 유형을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첫 번째 유형이 바로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Christ against culture) 부류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쉽게 설명하면 그리스도인이 부정확한 정보로 그럴듯하게 내세워 다른 종교인, 무신론자, 타인의 논문이나 사이트, 책 등 배타적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라고 이해하면 된다. 

개신교와 다른 관점에서 글을 쓴 책이나 글을 그들의 글과 사이트, 그리고 모든 출판물에 대해 존중과 배려와 기본 예의범절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 비평이 이루어질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인들이 쓴 책이나 그들의 시각에서 쓴 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개신교 시각에서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들이 쓴 책이 잘 팔려 “정말 큰 일”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각에서 개신교 저자들의 출판물을 보면 똑같은 반응을 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각 종교가 자기들이 믿는 종교 교리와 신학만 강조하면 종교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양한 종교, 언어, 인종 등 문화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또 그런 문화를 벗어나서 살 수 없다. 그들이 “알 + 이랑”을 주장하든 뭐를 주장하든 학자로 바른 안내를 하고 싶으면 논문을 통해 정확한 검증을 통해 최대한 예의와 배려와 존중을 겸한 반박을 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개신교 생각을 보여주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자신이 배운 신학적, 교리적 관점에서 장난질로 보거나, 심하게는 이단 사이비 학설로 보거나, 아전인수로 보려는 배타적 태도로 평가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H.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미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첫 번째 단계인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라는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개신교인은 다른 종교인들이 성경과 다른 관점에서 썼다 하더라고 하나의 국가와 같은 문화라는 영역에서 함께 상생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종교와 인종에 상관없이 문화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개신교와 다른 의견의 출판물이나 사상에 대해 존중과 배려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종교인들, 무신론자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쓴 학자들의 글에 대해 개신교적 시각에서만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시각은 기독교에 독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크며, 종교전쟁, 사상 전쟁, 이데올로기 다툼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의 글은 종교가 화합과 평화보다는 종교 이념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더 크다. 개신교와 다른 종교인들의 종교문화와 그들의 사상과 그들의 논문과 출판물, 사이트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신교의 교리적, 신학적 관점에서만 비난한다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라는 말씀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가르침이다. 

오히려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저작물을 통해 개신교가 교리적, 신학적으로 더욱 튼튼하게 서는 계기로 삼는 게 더 중요하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개신교와 다른 종교, 다른 분야의 저작물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개신교도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배려와 존경을 받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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