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1-4, 38-41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약 120여명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며 기다리던 중 열흘만에 성령께서 그들 중에 임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므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기독교에서는 성령강림절을 교회가 창립된 날로 기념하고 있다. 즉 교회는 성령님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만나서 하나로 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임하시는 모습을 사도행전 2장2절과 3절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같은 성령>

2절에서 "바람"은 헬라어로 '프노에'(πνοή)라고 하는 여성명사로 '바람' 또는 '호흡'(행 17:25)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는 '바람이 불다' 또는 '숨을 쉬다'라는 헬라어 동사 '프네오'(πνέω)에서 유래된 말이다. 

'프네오'(πνέω)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설명하실 때에 '바람이 불다'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바람(πνεῦμα, the wind)이 임의로 불매(πνέω)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εἴδω) 못하나니 성령(πνεῦμα, the Spirit)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그런데 여기에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라고 할 때의 "바람"은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헬라어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의 "성령"과 같은 단어이다. '프뉴마'는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는 모두 '성령' 또는 '영'으로 쓰였는데, 요한복음 3장8절 앞부분에서는 '바람'으로 번역이 되었다. 

한글 성경에서는 '프뉴마'를 '바람'이라고 번역한 부분이 한 군데 더 있다. 시편 104편4절을 인용한 히브리서 1장7절("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πνεῦμα)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에서 한글 성경과 NIV는 바람(the wind)으로 번역했으나 KJV는 영(spirits)으로 번역했다.

그리스어 '프뉴마'(πνεῦμ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רוּחַ)이다. 그런데 '루아흐'(רוּחַ)가 구약에서는 '바람'으로 92회나 사용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슴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רוּחַ)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창 8:1)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רוּחַ)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출 10:13)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רוּחַ)이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 넣으시니"(출 10:19)

"주께서 주의 바람(רוּחַ)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출 15: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רוּחַ)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삼하 22:11, 시 18:10, 104:3)

삼하 22:11과 시편 18:10, 104: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시며 "바람" 날개 즉 바람이 상징하는 그룹 날개 위에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 104:4에서는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라고 말씀한다. 시편 99:1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모습은 지성소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성경에서 '바람'으로 번역된 '루아흐'(רוּחַ)는 자연의 바람을 넘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영들'(spirits)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어 '프뉴마'(πνεῦμα)는 중성명사로 '바람이 불다'라는 '프네오'(πνέω)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성령이란 바람처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바람'으로 번역된 '성령'의 속성을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지 못하다"의 '알다'라는 헬라어 '에이도'(εἴδω)는 '(단순히)보아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눈으로)보다'라는 뜻이다. 즉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그것을 육의 눈만 갖고있는 이들은 결코 볼 수 없으므로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도 이처럼 육의 눈만 갖고 있는 이들은 알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3장10절에서는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γινώσκω)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의 '알다'라는 말은 '기노스코'(γινώσκω: 알다, 지각하다, 이해하다)로 쓰였다. 즉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그것을 눈으로만 보고 그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11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에이도 εἴδω) 것을 말하고 본(호라오 ὁράω)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너희"는 '유대인'을 말하며, 그것과 대비하여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을 증거할 때 영의 눈이 뜨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받지 못하지만, 주안에 거하는 이들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표적을 육의 눈으로 보면서(εἴδω) 동시에 영의 눈으로 보고 깨달아 알기(ὁράω) 때문에 육의 눈으로 보고 안 것과 영의 눈으로 진짜 실체가 무엇인지를 본 것을 증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27절에서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요한복음 17장24절에서는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쎄오레오 θεωρέω)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하신다. 

니고데모(Νικόδημος, נַקְדִימון: victorious among his people)는 '승리'(victory)를 뜻하는 여성명사 '니케'(νίκη níkē)와 '사람들'(people)을 의미하는 '데모스'(δῆμος)의 합성어로 '정복자' 또는 '백성의 승리자'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다. 

즉 니고데모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에게 있어서 승리자이며 지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왔는데 그를 통해 유대인들은 모두 영적인 눈이 멀어서 예수께서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볼 수가 없고 성령과 거듭남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셔도 깨달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육의 사람들일 뿐, 성령에 관하여는 결코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가결하여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예수께서는 죽기위해 오셨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들의 승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인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일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하신 이들 이외에는 결코 알 수 없으며, 그들만이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고 분별(θεωρέω)할 수 있는 것이다.

<불같은 혀처럼 갈라지는 성령>

3절에서는 성령의 모습을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혀"로 번역된 헬라어 '글로사'(γλῶσσα)는 '혀'라는 뜻 이외에 '방언'(막 16:17, 행 19:6, 고전 12:10) 또는 '말'(고전 13:1)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혀를 조심하라"라는 말은 "말을 조심하라"라는 의미로 쓰이듯이 '혀'라는 것은 '말하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성령께서 임하시는 모습은 '불같은 말씀'으로 임하셨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검', '말씀의 검', '화염검'(flaming sword) 등과 같은 의미이다.

"불같이 갈라지는" 것은 민수기에서 '불뱀'(fiery serpents)을 생각나게 한다. 성경에서 뱀은 두 가지 속성을 보여준다. 뱀의 혀는 두개로 갈라져있어서 단물과 쓴물이 동시에 나오며 불뱀과 놋뱀의 죽이고 살리는 서로 상충되는 면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요한복음 3장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민수기 21장8-9절에서 불뱀들(הַנְּחָשִׁים הַשְּׂרָפִים)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가 놋으로 불뱀(שָׂרָף)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은 것을 예를 드시면서 예수님도 장대 즉 십자가에서 놋으로 만든 불뱀처럼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민수기 21장8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불뱀(שָׂרָף)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말씀하는 "불뱀"은 히브리어로 '샤라프(שָׂרָף)인데, 이는 '스랍'을 말한다. 민수기 21장6절에서 쓰인 '불뱀들'은 '스랍 뱀들'을 말하며 여호와께서 장대에 달라고 하신 '불뱀'은 '하나의 스랍'이다. 이 단어는 이사야 6장2절과 6절에서 '스랍'으로 번역되었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שְׂרָפִים)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שָׂרָף)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하신 것은 '불뱀들'이 아니라 '불뱀'(스랍, שָׂרָף) 즉 단수의 '천사'이다. 스랍들은 다른 천사들과 구별되어서 인간의 죄를 성결케 하는 봉사를 하는 천사를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스랍'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고, 모세는 놋으로 '뱀'(נְּחָשִׁ 나하쉬)을 만든 것이다. 

성막의 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번제단'이다. 번제단은 놋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돌아가신 고난을 의미한다. '놋'은 '고난'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스랍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신 여호와께서는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놋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들리게 하셨던 것이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이라는 불뱀을 통하여 먼저 우리의 죄를 알게하고 그 죄로 인하여 불뱀에 물려 율법으로 죽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이들을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여 그들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 '의'로 인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모세는 왜 스랍을 뱀으로 만들었을까?>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사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자 그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 그리고 뱀의 꼬리를 (강력하여)잡으라고 하셔서 그대로 하니 다시 지팡이로 변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출 4:17)라고 하셨고, 그후 모세는 그 지팡이로 홍해가 갈라지게도 하며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도 했다. 성경에서 지팡이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예표하는 것이다.

모세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광야에서 양떼를 치면서 40년간을 의지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의지했던 지팡이가 뱀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두고 의지하는 것이 때로는 뱀이 되어 우리를 물어 죽게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을 강하게 제압(꼬리를 제압하라)할 때에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모세의 지팡이가 변한 뱀은 '나하쉬'(נְּחָשִׁ)였다. 그런데 아론과 함께 바로앞에 가서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변한 뱀은 '탄닌'(תַּנִּין)이다. '탄닌'(תַּנִּין)은 창세기 1:21에서 '큰 물고기'(great whales)라고 번역되어 나오며, 출애굽기 7장에서 아론의 지팡이는 '뱀'(a serpent)으로, 그리고 신명기 32:33에서는 '뱀'(dragons), 느헤미야 2:13와 욥기 7:12에서는 '용'(dragon), 시편 44:19, 이사야 34:13, 예레미야 9:11, 10:22 등에서는 '시랑'(dragons), 예레미야애가 4:3에서는 '들개'(the sea monsters), 에스겔 29:3, 32:2에서는 '큰 악어'(dragons), 그리고 미가 1:8에서는 '들개(dragons)로 각각 번역되었다.

따라서 아론의 지팡이가 변한 뱀은 모세의 지팡이의 뱀보다 훨씬 큰 것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바로왕의 술사들도 지팡이를 던져서 그곳엔 뱀이 여러 마리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 뱀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아론의 지팡이가 변한 뱀은 '용'이라고도 하는 '큰 뱀'이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뱀은 옛뱀인 마귀를 상징하며 바벨론과 애굽을 의미한다. 애굽의 왕 바로는 코브라를 이마에 붙인 왕관을 쓰고 있다. 그들은 그 뱀이 그들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애굽 왕실에서 자란 모세는 유모역할을 했던 어머니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지만, 뱀에 대하여도 영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게 하시며 그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적을 행하라고 하셨다.

이러한 모세의 배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불뱀들에게 물려 죽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랍을 만들라고 하셨을 때에 모세가 '뱀'을 만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와 아론의 지팡이는 뱀이 되어 애굽의 강력한 권세를 제압했기 때문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할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그들을 죽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뱀들은 '스랍 뱀'이다. 즉 '뱀'은 뱀인데 스랍(천사) 뱀이다.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지금'을 살라고 하신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며, 내 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서 놓으라고 하시며 이성적인 지식을 버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것을 강하게 제압하라고 하신다(뱀의 꼬리를 잡는 것). 즉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그것을 버렸다면, 그것과 싸워 이기라고 하신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 즉 영적 음란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으라고 하신다. 

우리의 가족과 재물과 명예를 다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강력하게 만드셔서 다시 그것을 잡으라고 하시며 그것을 통하여 사역케 하신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나를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한다고 하신다. 그래서 모세의 눈 앞에서 불뱀들로 인하여 죽어가는 이들을 바라보던 모세는 놋으로 뱀(나하쉬)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세에게 있어서 뱀은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를 반대하고 원망하는 이들을 심판하는 도구였다.

<들리다>

예수께서 "인자도 들려야(ὑψόω) 하리니"라고 말씀하실 때, "들리다"(ὑψόω 휩소)라는 말은 "높임을 받다"(exalt, to lift up on high)라는 뜻이다. 즉 십자가에서 놋으로 만든 불뱀처럼 들려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 "높임을 받는 일" 즉 그 고난을 통해 영광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들리다'라는 헬라어 '휩소'(ὑψόω)는 '휩소스'(ὕψος: 높이, 높은 곳, 하늘)라는 중성명사에서 유래된 말이다.'휩소스'(ὕψος)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ὕψος)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ὕψος)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ὕψος)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시 68:18) 하였도다"(엡 4:8)

"낮은 자를 높이(ὕψος)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욥 5:11)

<성령강림과 임직식>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뒤에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예루살렘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교회를 세우신 성령님은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며, 불같은 말씀으로 즉 불뱀처럼 율법으로 우리를 물어서 죽게하시며 놋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게 하도록 두 갈래로 갈라져 임하시므로 영의 눈이 뜨지 못한 영적 소경들은 그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영적 소경들은 주의 말씀이 임하실 때에 들을 귀가 없고 볼 눈이 없기에 불뱀으로만 보고 율법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령강림절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여 '오순절'로 지켜왔다. 이 날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율법을 받은 날이며, 신약에 와서는 성령께서 임하신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불의 혀처럼 나뉘어져서 임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과거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내려온 모세가 본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우상을 만들어놓고 음란하게 섬기는 모습이었다. 그때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들을 죽이라고 했고, 그때 레위인들이 나와서 그들의 가족과 이웃을 3천명 가량 죽였다. 그러나 율법을 받을 때와는 달리 성령께서 임하신 성령강림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영적으로 죽어있던 3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다. 

이는 율법은 죽이는 것이지만, 율법으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과 연합이 되면 살아난다는 것을 말씀한다. 즉 우리를 고발하는 모세 즉 율법의 정죄로 인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며 그분과 함께 진정으로 죽었을 때에 우리는 성령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주신 율법은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 실체가 오셨으므로 거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이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이 되어 죄인에서 의인이 된다는 말이다(이신칭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의인은 이세상에 아무도 없기에 우리가 그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되려고(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오직 영생을 얻는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성령께서 강림하셨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말이며, 이는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백성으로 임직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우리의 의가 왕이나 제사장으로서 합당하기 때문에 그러한 신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그의 몸인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돌로 지은 성전이 무너지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이 성전이 되게 하시므로 과거에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성전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이들 모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셨다는 것은, 공허하고 혼돈하며 어둠에 쌓여있던 땅(창 1:2, 렘 4:23)인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하늘에 속한 거룩한 나라와 왕같은 제사장으로 기름을 부어 임직식을 거행하셨다는 것이다. 과거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시고 기름을 부으셔서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신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직식을 거행하신 것이다.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모세가 그 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더라"(출 40:12-16)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으로 임직식을 거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령세례를 받아 거룩한 백성으로서 왕같은 제사장직에 임직되어 이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와 증인이 되었느냐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적용]

지금도 목이 곧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 쳐다보면 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목이 뻣뻣해서 쳐다보지 않는다. 영생의 길을 수없이 들어서 지식으로는 알고 있으나 그것을 실천할 믿음이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있다고 하는 성경말씀 중에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불뱀에 물려 죽어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나는 놋뱀을 쳐다볼만큼 처절하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즉 영생의 복을 받고 싶은가? 아니면 이생의 자랑과 복을 원하는가?

내가 "주여, 주여"하며 외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정욕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함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무시하여 미워하고 용서치 않고 화해하지 않고 살아가면서도 당신은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당신은 불뱀에 물려 죽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기도 제목]

1) 혼과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2) 죄인으로 태어나 공허하고 혼돈 속에서 어둠의 자식으로 살던 저를 하늘에 속한 거룩한 백성으로 신분을 바꾸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3) 영의 눈과 귀가 멀었던 저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어두웠던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영의 세계를 보게 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기 위해 주셨는데, 그래서 그 율법을 지켜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저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저의 어떠한 의로운 행위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 위해 주셨는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 때문에 어차피 지킬 수 없는 것이므로 아예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강퍅함을 고백하오니 긍휼히 여기 주옵소서

5) 모태신앙 또는 오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또는 중직을 맡은 자로서 살아왔으나 니고데모처럼 성령에 대해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주님의 양떼들을 이끌어왔던 것을 고백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저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육의 눈으로만 보며 영적 소경으로 살지 말고 이제부터는 영의 눈을 떠서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보며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6) 과거에 저는 불뱀에 물려서 즉 율법주의자로 살아가면서 성경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데만 빠르며 제 자신이 회개의 자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놋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데, 목이 굳어서 높이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함을 이제라고 알게 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저의 죄를 깨닫게 된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알기에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7) 오늘과 내일과 영원히 성령님과 연합된 성전으로서 잘 살아가도록 항상 저와 동행해 주시고 저의 발의 등불이 되어주시며 온전한 주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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