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준의 리더십

3.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준의 리더십

김준은 새마을운동의 중심에 서서 농촌지도자의 리더십 육성을 통하여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성공에 크게 기여 하였다.

새마을지도자 교육훈련에서 그는 스스로 행동하는 실천적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기독교는 그의 행동 지향적 실천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수는 행(行)치 않고는 말한 일이 없는 것으로 안다. 제자의 발을 씻어 주면서 섬김을 받는 자보다 섬기는 자가 더 높다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기독교 자선단체 동광원에서의 수련은 실천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강화 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실천성은 농촌운동에 대한 그의 헌신과 열정의 바탕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그의 열정은 불과 같았다. “교관은 학벌보다는 농촌운동에 대한 애착과 농민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몸공(功)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한 그는 교관요원 선발에서도 실천적 열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90년 미국 콜로라도 선라이즈랜치에서 필자와 김준 회장

그는 설득보다는 행동, 말의 선전보다는 행위의 사실을 강조 하였다. 이러한 실천성은 그의 리더십에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새마을교육의 성과에 기여하였다. 그의 언행일치는 새마을운동이전에도 나타난다. 가맛골에서 복음농민의숙을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을 때 그는 실천을 통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하였다. 동과원에서 고아들과 생활할 때 자신이 먼저 실천하여 고아들이 의심을 버리고 믿고 따르도록 하였다.

김준은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信), 즉 믿음이라고 믿었다. 언행이 일치하면 믿음이 생기고 불일치하면 불신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의 실천성은 새마을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깊은 잠에 빠져있던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요인 이었다. 그는 실천성을 자신뿐만 아니라 교관들에게도 강조 하였다. 그는 “왜 새마을운동에 전국민이 절대적 호응을 했느냐 하면 과거는 말만 앞설 뿐 실천이 없었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실천,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솔선수범한다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핵심은 생활, 즉 교육입니다”라고 했다.

“새마을은 몸 공을 드리는 것입니다. 대학교육? 실력? 박사? 천만에 말씀입니다. 무한한 부모의 정(情) 그 원리가 바로 공(功)입니다. 그 원리가 새마을교육의 원리입니다. 교관들이 무한히 몸 공을 쏟을 때 새마을교육은 산 교육이 됩니다.”

그는 교관요원의 뛰어난 성과는 높은 물질적 유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주로 그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신념과 성취동기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 하였다. 그는 일선 새마을지도자들에게도 봉사성과 실천성을 교육하였다. 새마을지도자가 마을에서 리더십을 행사하려면 스스로 모범성과 실천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고 이를 가르쳤다. 그는 새마을지도자에 대한 보수제공을 반대 하면서 봉사성을 강조 하였다. 주민들로부터 자발적인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새마을지도자는 자기희생적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행동과 관념의 일치에 대한 강조는 새마을교육의 성공에 기여하였다.

새마을교육을 회고하면서 김준은 “새마을교육은 농촌과 도시, 농민과 상공인 간, 공무원과 국민 간, 지역과 계층 및 직종 간에 국민화합으로 승화시키고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선도적 역량집결의 구심체라고 생각”한다고 하며 새마을교육의 국민통합의 기여를 강조 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중심에 서서 김준이 보여 주었던 실천적 리더십은 농촌변화에 기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으로는 우선 근대화를 언급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농촌 근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을 이야기하게 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짧은 기간 동안 농촌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환경개선사업과 소득증대사업을 통해 농촌의 삶의 질을 개선하였고, 농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자신과 용기를 주었다. 이 같은 성과의 요인은 새마을운동이 관념과 이론이 아닌 행동과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마을운동을 평가하면 우리는 또 자연스럽게 김준을 떠올린다. 김준의 순수성과 열정은 농촌개발의 주역이었던 새마을지도자들뿐만 아니라 1970년대 농촌사회의 변화를 목격한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지금도 김준은 ‘새마을지도자의 지도자’로 혹은 ‘새마을운동의 교주’로 불리고 있다.

김준(1926~2012) 전 새마을운동중앙회장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 혜경 김준선생(1)

 

1. 새마을교육의 정신적 기조 동광원과 귀일원 정신

새마을운동기록물은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난중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새마을운동의 지도이념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이다. 이같은 새마을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한 분이 바로 전남 영광출신으로 지난 2012년 타계한 김준(1926~2012) 전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다.

김준 회장은 1926년 4월 25일 전남 영광군 군남면 포천리에서 김명섭 장로와 조교촌 권사의 둘째 아들로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다. 그는 철이 들면서 우리집은 잘사는데 왜 다른 집은 굶주리며 가난하게 살까? 하는 의문과 불공평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부모님 몰래 쌀과 밥을 훔쳐다 굶고 있는 가정에 가져다주고, 마루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밥상을 마다하고 마당의 멍석에서 머슴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그는 이리농림학교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에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어느 주일날 종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곳이 재매교회(현 신안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들은 설교는 과거 어느 교회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순수하고 차원 높은 진리의 말씀이었다. 설교가 끝난 후 말씀하신 분을 뵙고 싶은 마음에서 찾아가니 막 점심상을 받고 있었다. 그 밥상을 보는 순간, 아! 이 분이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실한 성직자구나! 하는 감동과 함께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바로 동광원(기독교수도공동체) 정인세 목사였다. 그 후 부터 광주시 남구 방림동 밤나무골에 드나들며 동광원 사람들의 신앙 생활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 곳이 바로 이곳이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김준 회장 친필

이후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 선생,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성경 말씀과 인생에 대하여 논하면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삶의 가치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데 두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1955년 교수직을 버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똥통을 지고 농사를 지으며 동광원 고아들을 교육시키면서 1959년까지 생활하였다. 김준 회장은 동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근검절약, 협동과 자급자족 생활을 습득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은사인 유달영 교수의 추천으로 1960년대 초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하여 경상북도 지부장을 맡고, 그 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원장과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박정희대통령과 함께 새마을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주역이 되었다.

김준 회장은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실천 방법은 동광원의 정신과 생활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남에게 피해 주거나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동광원의 정신과 삶이 내가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펼친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과 실천운동의 근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김인만의 저서 「임자, 막걸리 한잔 하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새마을 연수원장 김준도 과로로 쇠약해졌다. 김원장에게 보약 좀 보내줘! 내가 보내더란 말은 하지 말고..." 박정희 대통령이 보약을 챙겨준 김준에게는 새마을운동이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을 정착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를 사람들은 “새마을 교주(敎主)"라고 불렀다. 김준은 기독교수도공동체 동광원과 인연을 맺은 이래로 항상 가족으로서 동광원과 귀일원(동광원이 세운 사회복지법인)을 왕래해 왔으며, 1994년부터 2012년까지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참고자료>

1. 『귀일원 60년사』

2. 『복흥면지』 2011년호

3. 『전환시대의 행정가』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준론(박종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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