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막은 내려질 것이고 우리의 본향(히11:16)은 영원한 나라이기......

이 이삭 목사 (Azusa Pacific Univ. Calvin Theological Sem.)

고래나 물개들이 가끔 바닷가로 올라와 자살 소동을 벌이며 죽어 가는 것을 사람들이 치료하고 바다로 다시 돌려보내느라고 애쓰는 모습을 종종 뉴스에서 보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자살이 아니라 일시적인 방향감각의 이상 때문이라고 한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고래는 바닷가를 깊은 바다로 오인하고 올라와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간혹 산양들이 집단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아니면 벽에 머리를 부딪혀 자살을 한다는 뉴스도 듣곤 한다. 산양이 뭐 그렇게 살기가 힘들며 삶을 비관할 일이 있어 그 높은데서 떨어지기를 불사하며 스스로 머리를 벽에 부딪쳐 피흘리며 죽어야 할 일이 있을까 하고 안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런 현상은 소금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산양들이 산에 살다보면 염분 섭취가 줄어들어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부족하게 되며 이 도파민은 정신병과 관련이 있는 성분으로 결국 양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머리를 벽에 박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살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행하는 행위이다. 2016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은 하루 평균 36명, 40분마다 1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1년에 1만3천92명이 죽는 셈이며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자살률) 25.6명으로 단연코 세계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비율은 교통사고 사망률(10.1명)의 2.5배에 이르고 특히 10대와 20대, 30대 청소년, 청년층 사망 원인의 1위가 된다니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에밀 뒤르케임(E.Durkheim1858-1917)

자살 연구의 효시가 된 자살론(Suicide, published in 1897)의 저자 에밀 뒤르케임(E.Durkheim1858-1917)은 자살을 사회와 연관시켜 이기적 자살(Egoistic), 이타적 자살(Altruistic), 사회적 자살(Anomic)로 자살의 형태를 구분하고 사회심리적 고립 현상에서 야기되는 ‘아노미’(Anomic Suicide)가 현대사회에서의 자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이론처럼 표면적으로 보면 사회문제가 자살을 부추기는 동기가 될 수 있다. 항의성이 짙은 투신자살의 동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은 자살의 동기는 인간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무적 정서(emotion of nihilistic ) 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허무를 표현하는 더 깊은 용어 아모르피즘 ( a•mor•phism )은 불멸 ( immortality )의 반대 개념, 즉, 죽음을 깊이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허무는 결국 죽음에서 오며 죽음은 인간의 원초적 죄(Original Sin )에서 기인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살론]

그래서 성경이 정의하는 인생 역시 허무, 그 자체이다. 베드로전서1:4에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니 ”…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 누구나 살수록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매일 먹고 자고 일하고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의 지루함에 몸서리 칠 수 있다. 열심히 살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불합리와 모순의 굴레에 구토할 때도 있다. 그뿐인가 날이 갈수록 늙고 병들고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을 익혀가는 인생….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며 구차한 삶을 살아야 할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만일, 인간에게 그럴듯한 삶의 목적이 없다면 자살하는 사람이 아마 가장 정상적이고 철나고 똑똑한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자살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권리이며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고상한 행위 ” 라는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4 ~ AD65)의 말은 백번 지당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편37편23에 보면 “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定)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라고 삶의 의미를 대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야 할 이유는 죄값으로 주어진 천형(divine punishment)의 삶을 통해 구원의 길을 가도록 사람의 걸음을 정하신 하나님의 깊은 경륜이 있기 때문이며 붙드심의 손길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난 성도는 더 이상 이생의 단막짜리 오페레타( Opereta )에 목을 매고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넘어져도 영원히 엎드러질 사람들이 아니다. 극중에 좀 잘살든 못살든 슬프든 기쁘든 성공했든 안했든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차피 막은 내려질 것이고 우리의 본향(히11:16)은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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