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7-23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은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우리 주 나사렛 예수께서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주의 백성이 예수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그 생각과 몸으로 지키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마음 안에는 옛사람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반대로 거듭난 생명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입은 새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속한 부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갈등이 호흡을 마치는 그 날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믿음으로 행할 때, 그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그의 몸과 지체와 삶으로 나타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사는 그리스도인들, 즉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사는 신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것이며, 이에 어둠과 죄의 세력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신자 안에 있는 사륵스라고 불리는 죄성이 힘을 잃고 죽은 것처럼 있게 될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사는 신자의 주변에서는 그 신자로 인하여 마귀와 죄와 어둠이 힘을 잃고 도망칠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14장 17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시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에 그 증거로 성령을 보내셨으니, 누구든지 주의 성령으로 거듭나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림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는 주의 재림 때까지 누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인 반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우리가 부활체를 얻은 후에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이 땅 전체에 임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7절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이 표현을 하게 된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 어떤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 인하여 그 음식을 양심 때문에 먹지 못하는 믿음 약한 형제의 시험거리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에 나온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자가 믿음 좋은 사람의 행위 때문에 낙심하고 믿음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 이방 신전에서 드려진 고기가 시장에서 팔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방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많다 보니 신전에서 다 처리를 못하고, 버리자니 아까워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는 우상 신에게 바쳐졌던 고기는 마귀에게 드려졌던 것이니 결코 신자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우는 만일 어떤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다는 것을 알면 결코 그 고기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혐오하고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믿음이 깊은 신자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다면 그들은 크게 실족하고 번민에 빠질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영적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자신들도 먹게 된다면, 그들은 스스로 양심을 어긴 상태가 되어 심한 죄책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믿음이 뛰어나다는 신자 및 영적 지도자에 의해 크게 시험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그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악하다고 믿는 바에 해당하는 행위를 그들의 영적 지도자가 행함으로써 그들이 보기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더 깊은 지식을 지닌 신자는 그러한 연약한 신자들을 멸시하며 대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무식한 저 신자들이 문제이지 내 양심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너희들이 실족하든 말든 나는 나대로 하련다’라고 하며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그들 앞에서 덥석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은 그들의 믿음과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믿음이 강한 자들 때문에 혼란과 죄책 속에 빠져 더 이상 믿음을 붙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 고기를 먹는 것을 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문제를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히겠습니까? 이러한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결과가 될 때 그 교회 공동체는 얼마나 비참합니까?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일이 발생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애처로운 일입니까? 

놀랍게도 성경은 이 문제를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할당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로마서의 경우도 14장과 15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고, 고린도전서의 경우 8장에서 10장까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땅 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남들이 시험이 들든 말든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완고하게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진술합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여기서 ‘의’는 신자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올바른 행동을 말합니다. 그 의의 뿌리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무한한 감사와 사랑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 안에서 성도를 통해 나타나는 의는 산상수훈이 말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3-16; 마 5:20)

둘째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붙드는 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계속적으로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성령 안에서의 '희락' 또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가 '의'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란 성령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계속 누리는 상태입니다. 이때 구원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진실함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흘러 나옵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보면,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18절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는 내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고, 이러한 열매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다고 알려줍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그런데 19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누림, 곧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 우리 역시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즉,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노력은 신비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코 저절로 되어지지 않으며 또한 결코 우리의 힘으로만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누려지지만 동시에 신자들의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롬 14:19-20).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 수많은 “아디아포라”가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자라난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관건들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살 때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를 확인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라 하더라도 먹어도 되는 것인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이러한 관건들은 동일한 동기,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를 가진 자들이 대화를 나누어도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는 관건입니다.

공동체 내에서는 각 사람의 성격에 따라 각 지체의 의견이 서로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오른 쪽에 두자, 아니다, 왼쪽에 두자. 이왕 사는 것 비싼 것으로 좋은 것을 사자, 아니다. 교회는 청빈할수록 좋으니 중고품 중에 싼 것으로 사자. 성도들의 풍성한 교제를 위해 맘껏 먹이자, 아니다. 교회는 말씀이 중요하니 먹는 것은 기본만 제공하면 된다. ….’ 

사실 회의만 했다 하면 사람 수만큼의 의견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아디아포라’ 문제로 공동체의 지체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고 업신여긴다면 그 지체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볼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디아포라’ 문제에 있어서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맞추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계속 세우는 비결이라고 알려줍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도다”(롬 15: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바울 역시 이 영적인 사랑의 원칙, 하나님 나라의 근본 원칙에 따라 고기 문제를 대하였습니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1-13)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23-3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 받은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얼마든지 누리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기도로 성령을 구하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의를 이루고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세우며 누리는 것을 가장 흔히 방해하는 문제는 ‘아디아포라’ 관건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이때 이러한 문제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면,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에게 맞추어 줌으로 그 누구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함이 지혜입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 내에서는 교회 질서가 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면 아무런 탈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가장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이 교회의 지체된 여러분 모두가 오늘 본문을 통해 허락된 ‘아디아포라’ 관건에 대한 영적인 해결 방법을 늘 기억하며 그대로 행하는 성숙한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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