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1 장 성경(7) 성경의 필요성과 단순성

7.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평범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벧후3:16).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지식, 믿을 사항, 지켜야 할 사안들은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성경의 각처에서 열려있다. 또한 학식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학식이 없는 사람도 보통 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구원 지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시119:105, 130).

All things in Scripture are not alike plain in themselves, nor alike clear unto all: yet those things which are necessary to be known, believed, and observed for salvation are so clearly propounded, and opened in some place of Scripture or other, that not only the learned, but the unlearned, in a due use of the ordinary means, may attain unto a sufficient understanding of them.

성경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구원 지식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합니다. 성경은 자체로 진리를 증거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제자를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내용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독자는 단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을 읽는 지체와 함께 교제와 교통을 추구합니다. 자신이 읽고 받은 은혜가 더 완전한 것은 다른 성경 독자와 교제하면서, 성경과 삶의 이해와 적용을 더 풍성하게 진행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명료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과 조명이 없이는 성경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명료하게 알 수 있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의 효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믿지 않으면, 복음에 감동이 없으며 비록 성경을 읽는다고 하여도 일반도서와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오직 성경에서 구원을 위한 지식의 소유와 고찰이 가능합니다. 성경에만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한 인간 구원의 필요한 지식이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죄사함과 영생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 마음의 평안, 현세의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의 할례(죄사함)와 사후의 삶(영생)을 위한 정진 속에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훈련시킵니다(disciple).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현세의 안정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완전한 구원을 사모하였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에 대한 이해를 아버지의 재산권리로 보았고 빼앗지만 결국 형 에서에게 모두 빼앗기고 정말 장자권만 소유하였고, 장자권 의미를 알고 인내와 평안의 삶을 영위하였습니다.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을 읽는 독자는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음의 확증입니다.

성경의 단순성은 성경을 읽는 독자는 교육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학문은 지식의 수준에 따라서 결정되지만, 성경의 지식은 지식의 수준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에 있습니다. 은혜는 일반적인 방법을 활성화시킵니다. 즉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과 교육과 교제의 방법으로 더욱 명백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제자에게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이 충분하게 이해되고 전달됩니다.

1 장 성경(8) 성경의 번역의 당위성

8.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용했던 언어, 히브리어)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예수 시대에 모든 나라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언어, 헬라어)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 영감받았고, 독특한 방식으로 보호와 섭리를 통해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기에 [절대] 권위가 있다(마5:18). 그러므로 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종교[신앙과 신학] 논쟁이 발생한다면 성경에 최종적으로 호소하여야 한다(사8:20; 행15:15; 요5:39, 46). 그리고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경에 관심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읽으며 성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성경 원어를 읽지 못하기 때문에(요5:39), 각 언어로 번역하여 모두가 읽도록 해야 한다(고전14:6, 9, 11-12, 24, 27-28).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 안에 충만하게 거주하며, [성경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갖고서 자기 언어로 하나님께 예배하며(골3:16),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해서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롬15:4).

The Old Testament in Hebrew (which was the native language of the people of God of old), and the New Testament in Greek (which, at the time of the writing of it, was most generally known to the nations), being immediately inspired by God, and, by His singular care and providence, kept pure in all ages, are therefore authentical; so as, in all controversies of religion, the Church is finally to appeal unto them. But, because these original tongues are not known to all the people of God, who have right unto, and interest in the Scriptures, and are commanded, in the fear of God, to read and search them, therefore they are to be translated in to the vulgar language of every nation unto which they come, that, the Word of God dwelling plentifully in all, they may worship Him in an acceptable manner;[ and, through patience and comfort of the Scriptures, may have hope.

중세 로마 교회에서는 평신도가 성경을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금하였습니다(1229년 툴루즈 회의, 1546년 트렌트 회의, 나무위키 참조). 오류 성경을 금지하기 위한 거룩한(?) 목적으로 성경 읽기를 금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14세기부터 꾸준히 자국어로 성경 읽기를 시도하였고,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루터는 독일어로, 올리베땅(Olivétan)과 칼빈은 프랑스어로, 제네바에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기반으로 번역된 성경은 급속하게 확장되었습니다. WCF에서는 성경번역의 당위성을 제시합니다. 연합성경공회(United Bible Societies, UBS)는 2016년 12월 말 기준으로 성경이 최소한 단편(쪽복음)이라도 번역된 언어의 수가 3,225개에 이른다고 발표하였습니다. UBS는 세계언어를 6,880가지로 보았고, 성경전서는 648 가지 언어로 번역하였고, 신약전서는 1,432 가지 언어로 번역하였고, 단편으로는 1,145개를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의 언어는 구약, 히브리어와 신약, 헬라어입니다. 일부(다니엘)는 아람어로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중세로마교회는 라틴어 성경(Vulgate)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성경 근본 언어로 확립하였습니다. 성경 저자들이 기록한 언어, 그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무오(Bible Inerrancy)는 원전의 무오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현재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돌봄의 섭리에 의해서 보존되고 유지되었습니다. 성경을 파괴하거나 왜곡시키려는 시도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경을 파괴할 수 없을 지경이기에, 성경을 왜곡하는 일을 합니다. 첫째 성경 왜곡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감과 수준을 왜곡하였습니다. 둘째 그릇된 성경 해석을 쉬지 않고 양산하는 것입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구원의 도리를 성경에 확실히 계시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성경 해석의 산물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양산하는 것이 변호적 사역입니다.

성경은 모든 교리 논쟁에서 최종 권위를 갖습니다. 18세기 제믈러라는 신학자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학계와 교회에 정착되었습니다. 이젠 학계에서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 위치가 아닙니다. 신학 대화와 변증에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고, 오직 이성의 합리에 호소해야 합니다. 이성의 격돌은 다수 숫자로 결정하기 때문에 성경의 절대권위에 호소하는 측은 반드시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과 성도가 소망 중에 성경이 주는 인내, 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오직 사제에게만 위로를 받을 수 있었지만, 개혁교회는 말씀(선포된 말씀)과 스스로 탐구한 말씀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말씀의 강단이 더욱더 풍요로워 지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주신 주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을 읽을 때에 선포된 말씀을 중심으로 베뢰아의 성도들처럼 탐구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은혜를 누린다는 발상은 루터파의 경건주의적 발상이거나 재세례파의 방종주의와 유사합니다. 성경해석은 합당한 교사를 중심으로 인식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말씀 사역자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전할 능력과 함께, 성도들에게 합당한 교육과 교통을 할 수 있는 학문 능력이 필수 사안입니다.

1 장 성경(9)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함

9. 성경을 해석하는 정확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리고 어떤 성경 본문에 대해서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해서 의문이 발생하였을 때(완전한 의미는 다수가 아니고 하나님), 그 의미는 더 확실하게 규정한 다른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탐구하며 알아가야 한다(벧후1:20-21; 행15:15-16).

The infallible rule of interpretation of Scripture is the Scripture itself: and therefore, when there is a question about the true and full sense of any Scripture (which is not manifold, but one), it must be searched and known by other places that speak more clearly.

WCF 1장 9절은 종교개혁의 성경해석원리인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 Scriptura interpres sui ipsius est”함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방법론이전에 성경의 최고의 권위, 성경의 명료성, 성경의 가신성을 의미합니다. 성경 해석을 위해서 다른 규범이나 도구를 도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탐구하여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여호수아의 태양멈춤을 이해하기 위해서 NASA의 보조증거를 도입시키는 것은 WCF의 성경해석 원리에 부당합니다. 예수 이해에도 여러 역사 기록이나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증거하는 것은 신앙의 유익이 아니라 접촉점을 만들기 위한 한 방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본문이 상호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에 대해서도 성경본문의 어떤 한 부분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비록 성경이 사본과 번역본으로 전달될지라도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첫째, 성경본문의 상호모순에 대해서는 성경의 가장 명확한 진술로서 판단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명확한 진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신 6:4). 또한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계시로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영광을 위한 성경해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이 선전(宣傳)되고 선양(宣揚)될 수 있도록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둘째, 성경본문에서 신학과 신앙 원리를 밝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리는 상호 긴장 혹은 충돌이 발생하는데, 이 때에 확실한 성경 본문 의미에 순종하는 겸양의 미덕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성경 훈련을 통해서 겸손이 증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임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에서 중세로마교회의 우화적 성경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을 거부하고, 역사적-문법적 성경해석(historical-grammatical method)을 도입하였습니다. 두 해석의 공통점은 기독론적 성경해석인데, 로마교회에서는 우화적 성경해석으로 사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종교개혁에서 확립한 성경해석 방법은 비록 목표가 선하다 할지라도 성경 본문 의미를 벗어난 의미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은 기독론적 우화적 해석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성경 본문에서 구원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는 성경 주석을 보여주었습니다. 참고로 우화적 해석은 기독론적 해석과 윤리적 해석이 있습니다. “벳세메스로 가는 소를 본 받으라” 같은 우화적 해석은 윤리적 해석이고 기독론적 해석이 아닙니다.

WCF 1장 5절에서 성령의 내적 사역(감동과 감화)을 진술하였습니다. 성경 자체의 원리와 성령의 내적 교사의 역할은 필수적인 관계입니다. 성경자체로서 문자에 매이면 이성이 되며, 성령의 사역에만 매이면 결국 신비주의로 가게 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한다할지라도 기복적이거나 맹목적인 종교 훈련은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 성경 본문 밖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구원의 유익한 지식을 이루지 못합니다. 경건의 유익은 성경을 해석할 때에 성령의 조명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거나 소홀이 여기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바른 영적 진리와 훈련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확실한 지식에서 불확실한 지식으로 탐구합니다. 즉 신자는 가장 확실한 지식이 무엇인지 스스로 답변을 해야 합니다(마 16:13-20).

제 1 장 성경(10) 성령과 성경이 최종 권위

10. 모든 종교적 논쟁의 확정, 교회 회의의 모든 결의와, 고대 저자들의 의견과 사람들의 교훈과, 개인적인 영적 문제들을 검토하고, 선고하는 최고 심판자는 어느 누구도 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성경에서 선고하십니다(마22:29,31; 엡2:20; 행28:25).

The supreme judge by which all controversies of religion are to be determined, and all decrees of councils, opinions of ancient writers, doctrines of men, and private spirits, are to be examined, and in whose sentence we are to rest, can be no other but the Holy Spirit speaking in the Scripture.

WCF 1장 10절에서 성령과 성경이 모든 신학 논쟁에서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고 제시하였습니다. 18세기의 독일 루터파 신학자 제믈러(J.S. Semler, 1725-1791)는 성경사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무효화하는 선언(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지 않다)하였습니다. 그 뒤로 교회와 신학에서 성경은 절대적인 자리를 상실하였습니다. 필자는 성경의 권위를 몰락시킨 ‘제믈러’라는 신학자의 발언, 예수를 실패한 혁명가로 규정한 라이마루스(H.S. Reimarus, 1694-1768)를 자유주의 사조의 시작으로 봅니다. 슐라이어마허(F.D.E. Schleiermacher, 1768-1834)가 믿음을 ‘절대의존감정(the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으로 확립하며 자유주의 방법론까지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에서 성경은 최종권위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진술을 신조로 받는 성도에게는 여전히 성경의 최종권위는 유효합니다. 성경은 신학과 신앙에서 최종적인 권위를 갖습니다. WCF의 교회에서 성경을 능가할 권위있는 문서와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성경으로 기독교가 공략될 것을 예견하고 "WCF 1장을 성경"으로 확립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주의는 “이성으로 신학함”으로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였고, 현대신학은 “이성에 근거한 믿음으로 신학함”으로 신존재까지 파괴하였습니다.

성경은 공회의의 선포, 고대교부의 가르침, 사람들의 교훈, 개인적인 영(靈)의 체험 현상까지 모든 신앙 논쟁을 결정합니다.

첫째, 성경의 최종권위는 확정된 교리에 대해서는 부정적 고찰이 아닌, 순복하는 자세로 고찰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교리는 니케야 공회의(3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381년), 에베소 공회의(431년), 칼케돈 공회의(451년)에서 결정되었는데 지금도 진위를 고찰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칼빈은 고대 회의의 결정이 성경 본문에 근거하고 있음을 성경 주해를 근거로 밝혔습니다. WCF는 확증된 성경 이해(교리)에 근거해서 불확실한 성경 본문을 해석할 것을 제언하고 있습니다.

둘째, 현재 다양한 교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보편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의 교리(Dogma)를 만들 수 없어 각 교파의 교리(doctrine)가 존재합니다. 그러한 교리에 대해서는 겸손한 자세로 성경적 진위를 고찰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서철원 박사는 WCF의 언약개념의 수정을 제안(은혜언약과 행위언약 -> 첫언약과 새언약)하였습니다.

셋째,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이나 믿음의 선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사도행전의 베뢰아 지역의 사람들처럼 성경으로 고찰해야 합니다. 신학을 깊이한다는 것은 곧 성경을 깊이 읽고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고대 교부 중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너무나 성경 본문에서 떠난 제시, 상상 등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우려를 표현하였습니다.

넷째, 성경의 최종권위는 결국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독자는 겸손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을 합니다. 주의 학교(Lord's School)에서 성령께서(cum verbo) 성경에서(per verbum) 훈련시키시고,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하십니다. 참고로 per Verbum, cum Verbo 이해는 다양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Verbo를 “해석된 말씀”으로 규정하고, 성경을 해석한 말씀을 통해서(per verbum), 해석된 말씀이 성령과 함께(vum verbo) 전달되는 구조를 제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결정은 성령이 하셨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개혁파는 451년 칼케돈 공회의까지 합당한 교리(Dogma)로 취합니다. 공회의 결정을 성경에 근거해서 성령이 교회에 주신 진리 체계로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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