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27, 박홍섭 목사

 마음에 없는 말로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을 립 서비스라고 합니다. “멋지십니다. 최곱니다. 어쩜 그렇게 잘하십니까? 대단하십니다.” 등 입술만의 말이 사람들에게는 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도 입으로 하는 고백과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롬10:10절의 말씀처럼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전제가 될 때 성립되는 것이지 그것 없이 말만 있는 입술 신앙은 마지막 날에 네가 너를 모른다고 할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 거짓된 신앙인 것이죠.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하나의 상황을 가정해서 이런 입술 신앙의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15-16절이죠.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 춥고 배고파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얼어 죽어야 하고 굶어죽어야 하는 절박한 형편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그에게 “참 안되었네요. 뭘 좀 입으시고 드셔서 힘을 내어 평안하게 가십시오.” 이렇게 말만 하고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다면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14절은 말만 하고 행동이 없는 이런 믿음을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이라고 했고, 17절과 26절에서는 죽은 믿음, 20절에서는 헛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19절에는 귀신들의 믿음과 비교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헛됨을 설명하는데 굉장히 신랄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 인줄 알고 믿고 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귀신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믿고 떠는데서 그치는 믿음입니다. 이들도 하나님이 계신 줄 믿고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믿지만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거나 돌이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무는 믿음입니다.

왜 사도가 귀신들의 신앙을 말할까요?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신앙이 머리로 아는 지식만 있고 행함이 없는 귀신들의 헛된 믿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귀신들의 헛된 신앙보다 더 못한 것이 말만 번지러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 신앙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는 잘 믿는다고 하는 데 실상은 귀신들의 헛된 믿음보다 더 못한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시체가 뭘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못합니다. 송장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사랑을 베풀지도 못하고 누구를 불쌍히 보고 도와주지도 못합니다. 그처럼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살아 역사 하는 믿음인데 말만 있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죽은 믿음, 시체신앙, 송장신앙이 아니고 뭐냐는 것이죠. 적나라한 비판입니다.

그리고 나서 야고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저 유명한 말을 합니다. 21절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24-25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성경은 로마서 3:28에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했고 에베소서 2:8에서도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야고보의 말은 성경의 진리와 다른 말인가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한 바울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야고보의 신학이 다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갈2:9절의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은혜로 받은 그의 믿음을 설명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장이었던 야고보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신학을 인정하고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신학과 신앙은 서로 악수하는 같은 신앙입니다.

그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야고보의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있는 믿음이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라는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때 행함은 자신의 의를 쌓는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 기인한 믿음의 행함입니다. 야고보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믿음의 행함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부족해서 행함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충분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행함을 위한 구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함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지만 행함을 위해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이 엡2:8절에서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나서 2:10절에서 곧바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야고보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도 의롭다 함을 받는 다고 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나무는 그 열매로 알리라고 하신 것처럼 믿음이 행함이라는 열매로 드러나야 하고 입증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어떤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며 구원 얻는 믿음입니까? 행함으로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기생라합을 통해 이 사실을 설명합니다. 21-25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과 라합은 행함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창15장에서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가 의롭다 함을 받았을 때 행함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입니다. 분명히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행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기 전에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할 때 무엇을 믿은 것입니까? 그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머리의 지식으로 아는 정도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라고 하시면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것을 믿었고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경우 이 믿음이 언제 증명되었습니까? 창22장에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따지면서 논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밤하늘에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고 모순처럼 보여도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그의 믿음은 이삭을 바치는 행함으로 산 믿음이고, 참된 믿음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입증된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 참된 믿음, 바른 믿음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 얻는 믿음은 반드시 이런 자리로 나아갑니다. 기생 라합도 동일합니다. 그녀는 어느 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듣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녀의 믿음이 언제 참된 믿음으로 입증되었습니까?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정탐꾼을 숨겨주었을 때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그녀의 믿음이 행함으로 참된 믿음으로 드러나고 입증되었다는 것이 야고보의 논증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산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심을 입은 중생한 사람이라면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의 행함 만큼입니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 얻는데 필요하고 행함은 상급 받는 것에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과 같이 갑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입니다. 믿음은 행함의 열매로 드러나야 하며 행함은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 헛된 것처럼 믿음 없는 행함도 헛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문맥이 단순히 행함과 믿음의 연관관계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문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법, 왕의 법, 자유의 법, 긍휼의 법인 이웃사랑의 법을 어기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차별하는 긍휼 없는 삶을 이야기 하다가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일차적으로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긍휼로 대하는 삶과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행함으로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행함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라면, 그리고 그 믿음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흘러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약자를 배려하고 정의와 공법을 흘려보내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거듭난 자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이 그렇게 반응하고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삶에 관심이 없고 인색하다면, 말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 아니고 정의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말씀을 맺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만 구원받고 나만 평안하면 된다는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 억울한 사람이 있고 헐벗은 사람이 있고 배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향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야 합니다. 내 주위가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면 나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진실이 조금이라도 흘러가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위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열매인 것입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고 성숙 미성숙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이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에 우리의 각성과 돌아봄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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