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의 기능과 도덕의 기능을 하나님의 간섭으로 보았다

조선은 주자 성리학인문주의가 판을 치던 영조 때부터 본격적으로 몰락하였고, 정조 때는 이렇게 몰락된 나라의 백성을 속이고 선동하여 오늘날로 말하면 조선에 사회주의를 심으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조는 성종, 인종, 영조와 함께 유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라를 망친 4대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 유교의 프레임을 벗어나보려 했던 왕은 대게 독살당하거나 쫓겨났다고 보기도 합니다. 세종, 문종, 세조, 예종, 중종 등의 죽음은 서서히 독살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이유가 그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리학은 범죄 수준의 약탈지배 통제를 합리화하였습니다. 조선조에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 같이 신학문의 도입과 개혁적 필요를 역설 했던 인물들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근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대의 원시사회주의 또는 원시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막연한 생각은 시대적 벽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1752-1800) 때 어느 해 한양에 큰 홍수가 나서 장안에 쌀 품귀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모든 미곡상점이 물에 잠겼는데 홍수 피해를 입지 않은 몇몇 미곡상들이 쌀을 숨겨 놓고 폭리를 취하였습니다. 이를 알게 된 정조가 화를 내며 재난의 때에 “쌀을 비싸게 팔아 폭리 취하는 모든 상인의 목을 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임금의 명령이 장안 곳곳에 방으로 나 붙었습니다. 이 때 한 젊은 신하가 황급히 정조 임금을 알현하여 임금께서 절대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간언(諫言) 하였습니다. 지금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의 목을 친다면 한양 백성이 정말로 굶어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젊은 신하의 간언을 들은 정조가 그 이유를 묻자 그 젊은 신하는, 지금 한양이 홍수로 쌀 품귀 현상이 일어나 부르는 게 값인 줄을 알고 전국의 쌀 상인들과 백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쌀을 가지고 한양으로 몰려오는데 그들이 “폭리를 취하는 상인은 목을 처라.”는 임금의 명령의 방을 보면 다 되돌아갈 테고 그렇게 되면 한양 백성은 굶어죽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이 명을 거두고 상인들을 그냥 두면 온 나라의 쌀이 한양으로 몰려와서 저절로 쌀값이 내려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조는 젊은 신하의 말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 명을 거두어들었습니다. 한양이 홍수로 인하여 일어난 혼란은 젊은 신하의 말대로 시장의 기능에 의하여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 젊은 신하가 바로 연암 박지원입니다.

박지원은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상공업과 시장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시장의 기능은 어떤 상인의 폭리도 사회를 발전시키고 정상화 시키는 무서운 힘이 되기도 합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도덕심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지만 상인의 이기심을 비도덕적이라 하여 비난하고 강제로 통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미국의 남부 도시 뉴올리언스를 정상적으로 되돌려 놓은 힘은 정부의 지원이나 민간의 지원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엉망진창이 된 뉴올리언스는 생필품의 품귀로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었지만 정작 뉴올리언스를 정상으로 회복시킨 것은 대통령의 재난지역 선포나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달려간 상인들의 이기심이었다고 합니다. 경쟁가격을 못마땅하게 생각 하는 것은 고고한 도덕심이 아니고 세상과 시장과 무엇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지력 미달 때문입니다. 지력 미달의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나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을 아주 더럽고 악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사회주의의 부정적 근간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고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중세 암흑시기를 기독교 때문이라고 보고 유교의 성리학이 조선후기를 암흑시대로 몰아넣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분석은 나름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세를 암흑시대로 만든 것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크지만 한 시대의 교회의 부정적 측면을 성경과 기독교 자체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무지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경제학 이론인 국부론(國富論, The Wealth of Nations)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대한 상식적 이해는 자유방임주의 경제 체제에서 국가는 시장에 간섭하지 않고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는 야경국가의 역할을 하며 국가가 시장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 즉 가격에 의해 자동으로 효율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효율성 유지 이론은 모든 사람이 경제활동을 함에 있어서 필요한 만큼의 수요만을 생산할 시에는 나름 건강한 경제가 유지된다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대안으로 두 번째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인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내놓았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인 1776년 3월 9일에 출판된 “국부론”은 무엇이 국가의 부를 형성하는가에 대한 세계 최초의 설명 중의 하나이며, 오늘날 고전 경제학의 교과서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총 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편 노동 생산력의 증대 원인, 제2편 자본 축적의 원칙, 제3편 경제발전의 여러 단계, 제4편 중농주의(重農主義)와 중상주의(重商主義)의 비판, 제5편에서 재정 문제를 논합니다. 산업 혁명 태동기의 경제를 반영하여 노동 분업, 생산성, 자유 시장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는 경제 체제는 자동적이며, 지속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놓였을 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미스는 이것을 가리켜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이라고 하였습니다.

1759년에 출판한 “도덕 감정론”은 7부로 나누어져, 제1부에서는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를, 제2부에서 제6부까지는 상찬(賞讚)과 처벌의 근거, 의무의 감각, 미(美)와 효용에 관해서, 관습과 유행에 관해서, 미덕에 관해서 논했으며, 제7부에서 종래의 도덕철학의 여러 학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이란 사회적인 행위의 규준(規準)이라는 의미이며, 시민사회에서의 질서의 원리입니다. 스미스는 그것을 ‘공감(共感)’의 원리로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의 행동이 타인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자기를 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기 행동을 시인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사회적인 행위의 규준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이기심의 철학을 설파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질서를 파괴하는 따위의 방종이 아니라, 이러한 객관적인 행위 규준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의 공적은 자본주의 사회를 상품 생산의 구조로서 다룬 것이며, 자유 경쟁에 의한 자본의 축적과 분업(分業)의 발전이 생산력을 상승시켜 모든 사람의 복지를 증대시킨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과 독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아담 스미스가 왜 시장의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을까요? 이러한 궁금증은 목사인 나에게 그가 신학을 공부하였고 도덕철학을 전공했으며 신학교에서 자연신학을 강의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관심을 갖게 합니다. 스미스가 신학을 공부해서 성직자가 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학은 엄격하게 말한다면 학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이론과 합리와 논리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은 그 말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에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으로 설명을 하려 했던 모든 이들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스미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음을 전제할 때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의 기능과 도덕의 기능을 하나님의 간섭으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신학자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곧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과학이나 학문은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단순한 경제체제의 차이가 아니라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학문도 발전할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가 신학자가 쓴 국부론을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믿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지평을 바라본 사람의 지평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차원의 세계, 고차원의 질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보이고, 보이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질서는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 질서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초감각적 질서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감각적 질서를 존중할 수 없습니다.

스미스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주고받는 물물교환의 기능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보았습니다. 일반인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손을 본 스미스의 그 믿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번영과 풍요를 안겨주었고 긍정적 경제의 지평을 열어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기적 인간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손을 밀치고 일을 그르쳐 자신은 물론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은 오늘도 인간 이기심이 난무하는 시장을 다스리셔서 고통과 질병, 무한경쟁의 세계를 평화와 번영, 건강과 아름다움의 세계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 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사 45:7,전 9:1)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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