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살 길, 히브리서 10:19-25

히브리서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9절에서 언급되는 성소는 20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휘장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 앞인 하늘 성소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휘장이 열림으로 이 땅의 성막의 지성소와 성소의 구분은 사라졌고, 주의 백성들이 곧바로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음으로 인하여 이 땅의 성막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막 안을 들여다보면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언약궤 위에는 시은소라고도 불리는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 위에 천사장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서로 맞대어 속죄소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주의 백성은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모형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19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의 의미가 그 앞부분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말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동물 제사가 아니라 친히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한 몸을 예비하셔서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단번에 영원히 십자가 상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언약을 폐하시고 둘째 언약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에 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합니다. 이제 새로운 언약이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 효력은 성령의 공식적인 사역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4-18)

이러한 의미에서 19절은 “그러므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고 우리 마음이 정결하게 되었으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 곧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 

특히 히브리서 10장을 눈여겨보면 예수님의 몸은 사람의 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5, 10). 

20절은 예수님의 육체가 하나님의 보좌와 우리 사이에 새롭게 열어 놓으신 살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던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로 인하여 그 가운데로 살 길이 열렸음을 말합니다. 즉, 주께서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주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친히 치르시고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19-20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한 법적인 효력을 언급하고 있고, 21-22절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몸의 변화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9-20절).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1-22절). 

놀라운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의 구속의 법적인 효력에 대해서는 예수의 피를 언급하고, 마음의 변화의 효력에 대해서는 큰 대제사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큰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즉,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맑게 씻기십니다. 물론 처음에 거듭날 때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단번에 영원히 씻기셨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3-7)

이러한 모든 위대한 역사는 오직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상에서 다 바치셨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2-14)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이처럼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되었는데 만일 이 은혜, 곧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역사를 부인한다면 그 거만함과 방자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하겠습니까?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살 길인 것을 알게 될 때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므로 새언약에 속한 우리는 마땅히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에 22절을 보니,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제안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그분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심은 이제 하나님 측에서는 우리를 만나기 위한 모든 일을 다 마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큰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분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천국에 들어가신 선구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담대하게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 인하여 우리를 받으실 것을 새언약을 통해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맹세 때문에 그분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시며 단번에 영원히 드려진 하나님의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효력으로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심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언약이 성립되었으니 모세를 통해 세웠던 옛언약은 낡은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한 것처럼 새언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곧 영생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제 우리는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었던 휘장이 사라진 가운데 맘껏 자유롭게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더라”(마 27:50-51). 

본문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의 육체를 휘장으로 비유한 것을 보게 됩니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즉, 그의 육체가 휘장이 찢어지듯 채찍에 찢기고 창에 찔리고 그의 피가 터져 흐름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새로운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찢기고 부서진 몸과 부어진 보혈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이제 우리의 죄 문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의해 해결되었고, 나아가 성령을 통해 영생, 곧 죄없는 의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전 앞에 자유롭게 나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

자, 21절을 보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니,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히 4:14). 

하나님의 집을 다스린다는 것은 청지기 또는 종과는 다른 신분입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입니다.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5-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십자가 상에서 보혈을 쏟으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의 원수를 그분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계속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중보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이루신 일을 누리고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나타난 결과

이제 22절을 보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이 구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의 마음과 몸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 알려줍니다. 그 결과는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가 새언약에 의해 깨끗하게 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 역시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의 제사 규정을 보면 맑은 물로 닦는 것은 동물의 피를 뿌리는 예식과는 다른 예식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피는 대속하는 역할을 하지만 물은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겔 36:25). 

그러나 지금 새언약은 그림자로 있었던 옛언약과는 다르기 때문에 22절은 우리의 몸을 실제 물로 씻는 예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신약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다행히도 에베소서 5장에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에베소서에서 볼 때, 물로 씻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서는 것과 연관됩니다. 즉, 아내가 남편 앞에 설 때 가장 정결하게 서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가 서기 위해 물로 씻어야 합니다. 이로 보건대, 물로 씻는 것은 보혈의 대속으로부터 발생되는 효과로서 말씀의 역사로 인하여 성령이 부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보혈로부터 나오는 생수처럼 맑은 성령의 샘물이 우리의 영혼과 죄로 물들었던 몸을 늘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온 마음과 몸 전체가 성령의 부으심으로 계속 충만하여질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러한 기도를 늘 드렸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거듭난 신자의 책임

그러므로 22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온 마음과 몸이 맑은 물로 씻은 상태에 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합니다. 

22절의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참 마음은 진실한 마음, 바른 마음, 나뉘지 않은 충성된 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의 시선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참 마음은 우상 신과 바람피지 않는 마음,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진실한 마음을 뜻합니다. 

또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원어로 보면, 온전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구속이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만들었음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4-25). 
이제 23-25절을 보겠습니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23절을 보니, 신앙생활의 본질을 말하는데 그 본질은 약속하신 분의 신실함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약속대로 행하실 것이 절대적으로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요동하지 않고 소망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지금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지만, 궁극적인 소망의 실현은 25절이 말하는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점점 역사가 흐를수록 ‘그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모든 약속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전혀 없이 거룩하여질 것이며 다시는 죄 가운데 거하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의 몸 역시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강하고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수 천년 동안 준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고 또한 잊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도다”(사 49:15-16).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주께서 세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신실하신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완전하게 미쁘신 분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의 확신 가운데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때문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주께서 새언약 가운데 현실과 영원한 장래에 대해 약속하신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24절에 보니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이러한 사랑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질투와 이기심과 교만에 갇힌 사람입니다. 현대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교만을 부추기는 거짓 설교와 허망한 교훈들이 많습니다. 형통 신학이 그러하고 신비 체험을 조장하는 가르침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 사랑을 서로 나누도록 격려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해 내가 죽고 겸손하게 섬기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또한 우리는 서로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24절은 25절과 연결되면서, 이기심은 모이기를 폐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선행은 서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도록 돕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모여 서로 믿음과 순종을 격려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귀한 일입니다. 즉, 24절의 격려는 신앙적인 격려로서, 믿음과 예배,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모이는데 힘쓰라고 권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서로 모이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느새 신앙이 차가워져서 시험에 든 후 마귀에게 패배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서로 나누며, 하나님 앞에서 더욱 순종하며 살도록 서로 격려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은 주의 권면을 망각한 자들로서 점점 생명의 길에서 미끄러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바랍니다. 그분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고 잘 했다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의 칭찬은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감사합시다. 나아가 미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의지합시다. 주님의 미쁘심을 확신하는 만큼 우리는 더욱 굳센 믿음 가운데 요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영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새 언약으로 불러 구원하신 무한히 감사한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찬송과 경배를 돌립시다. 그리고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힘차게 전진하며 달려갑시다. 주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주님 주신 힘으로 믿음의 경주를 달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으로 충만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