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 고백과문답 출판사 대표

원시적인 자연종교에는 가르침이 거의 없다. 그저 종교심과 기대하는 바가 있을 뿐, 무언가 가르침을 받고 수련하는 행위는 것의 없는 것이 원시적인 자연종교의 특성인 것이다. 반면에 고도로 발달된 종교에는 경전(scripture)과 더불어 가르침과 배움을 통한 수련(training)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요가(yoga)와 같이 오래된 베다(veda) 경전이 있음에도 주로 육체적인 훈련을 더 선호하는 종교가 있기는 하지만,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성장하고 자라는 것이야말로 참된 종교의 중요한 특성이다.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고백과문답 출판사 대표

그러므로 어느 일간지의 부록에서 국내의 어떤 종교학과 교수는 이르기를 “인간은 훈련을 통해, 독립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에서 연관적이며 상대적인 인간으로 변한다. 훈련을 통해 자신이 지닌 동물적인 본능을 승화해 신적인 속성을 발현시킨다. 훈련을 통해 매일매일 변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자신에 스스로를 감금시켜 놓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훈련(수련)만이 위대한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러한 특성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요가와 같이 인간 스스로의 육체훈련을 통해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그런 성격은 아닐지라도, 기독교 역시 매일매일 경주(marathon)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딤전 4:7-8절에서 사도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도가 마치 마라톤 경주의 도착점에 다다르기 직전의 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말들 가운데서 신앙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딤후 4:2절에서 디모데에게 이른 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확신이었다. 그런즉 사도가 비유한 경주는 다름이 아니라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딤후 3:14절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한 것이며, 이후로 15절에서 더욱 이르기를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한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17절)고 했다.

그러나 말세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기독교 가운데서도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딤후 3:12)아야 하는 형국이다. 이미 신자들조차도 딤후 3:2-4절에서 사도가 이른 것처럼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무엇보다 “경건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5절)하는 추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의 심령이, 이 말세의 때에 고통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마치 소돔성 한 가운데 있었던 ‘롯’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딤후 3:6절에서 사도가 이른 것처럼 많은 자들이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있는 체로 신자(believer)의 행세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기독교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미 확신한 일에 거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노래하며 춤추는 것 가운데서 오히려 가르치는 자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리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리니 “항상 배우나(배우는 척 하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7절)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사실 그처럼 신자들이 말씀을 배우며 자라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가르치는 자, 곧 말씀 사역자인 목사들이 먼저 말씀 가운데서 배우고 자라가야 한다. 오래전 신학대학원 혹은 학위 과정에서 주워들은 신학정보들이 아니라, 이후로 꾸준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며” 배운, 확신한 일에 거하여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목사 자신이 확신한 일에 거하여 그대로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이 무슨 수로 확신할 것이며, 무슨 수로 매일매일 실행하는 훈련이 되겠는가? 그야말로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으니, 그저 흉내나 내고서는 그것이 다인 냥 여러 가지 욕심에만 끌리게 마련인 것이다.

분명 사도가 이른 것처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렀으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있을 뿐인 것이 작금 대한민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4절)는 것을 신천지 등 도처의 이단들의 모임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고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따라, 오직 말씀만을 전파하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마 24:45)들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딤후 4:7)기를 위해 기도한다. “이제 후로는 그런 자들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8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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