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일 황상하의 신학덕담

사도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에게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바울도 이런 두려움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는데, 그렇게 수고하고 나서 정작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염려하던 일이 구약의 사울이나 솔로몬에게 일어났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솔로몬은 마을을 돌려 하나님을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사울이나 솔로몬은 구원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우리가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가 뭔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 구원 받을까?”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고 안 믿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는 구원 받았고 누구는 구원 받지 못했음을 우리는 알 수 없고 따라서 말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솔로몬이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셨지만 “사울이나 솔로몬 같은 사람은 구원을 받았을까?”라는 식의 의문을 갖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흔히 우리가 농담으로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라고 하는데,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추측하거나 단정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에서 넘어질 위험이 있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위험이 있습니다.

사울이나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난 구체적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불순종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진정성과 열정에 의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솔로몬의 경우,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을 금하셨는데, 솔로몬은 수많은 이방여인을 사랑하였으며 아내가 칠백 명이고 후궁이 삼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 혼인을 금하실 때, 이방 여인이 그녀가 섬기던 우상 신을 들여와서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섬기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염려로 끝나는 법이 없고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왕정을 도입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게 될 일과, 이방 여자와 결혼하게 될 때 일어나게 될 일이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대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돌아보아야 할 목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을 앞서가며 지켜 순종하는 본을 보여야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불순종의 본을 보였습니다. 솔선수범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나 되는 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인권과 여권을 유린한 아주 못된 사례입니다. 한 남자가 천 명의 여자를 소유한다는 것은 여자를 인격적 존재가 아닌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여자들 대부분은 왕의 여자라는 이유로 평생 결혼도 못하고 생과부처럼 지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지혜를 받아서 누구보다 지혜로웠는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하게 되었을까요? 아이러니 하게도 그 지혜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천하 모든 사람이 솔로몬의 지혜에 놀라고 부러워했으니까 교만할 대로 교만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솔로몬은 스스로 교만해져서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인데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해”하는 식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없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의미심장한 사실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은 창세기 3:5, 22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선악을 아는 일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원한 것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솔로몬이 가졌던 지혜를 갖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3장에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다른 관점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창세기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후에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3장에 의하면 선과 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엄하게 금하신 죄로 규정하셨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하면 선악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입니다. 물론 솔로몬은 좋은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지만 창세기는 선악에 대한 인식 능력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죄라고 규정합니다. 선악의 분별 능력이 왜 죄일까요? 이것은 어려운 문제인데, 그래도 성경 전체의 가르침의 토대에서 한 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선악을 분별한다고 했을 때 선악이 하나님과 독립된 개념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신학적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을 이야기 할 때 세 가지 이론을 다루게 됩니다. 첫째, 목적론적 이론, 둘째, 의무론적 이론, 셋째, 신명론(Divine command theory)인데, 기독교 윤리는 신명론입니다.

神命論은 가장 명료한 이론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했으니까 해야 하고, 하나님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같은 神命論이라도 가톨릭과 개신교가 입장을 달리 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엇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셨느냐,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옳으냐?”하는 문제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본체론(Substantialism), 혹은 실체론이라고 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 외에 무엇이 옳은가 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과는 별개로 옳은 것의 객관적인 표준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신명론은 주의설(主意說 Voluntarism)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합니다.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이론을 神意論 혹은 主意論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만약에 하나님이 살인하라고 하면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옳고 그른 다른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옳고 그르다고 하면 그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표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Augustine이 바로 이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옳고 그름의 표준이라는 설명입니다. Augustine 이후에 Thomas Aquinas(1225-1274 이탈리아의 신학자)가 나타나서 Aristoteles의 철학을 받아들이므로 본체론으로 다시 돌아섰습니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의 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본체론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모든 카톨릭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신학자 중에도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가진 신학자가 많은데,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파스칼입니다. 그는 카톨릭 신자였지만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이 종교 개혁을 할 때 가장 미워했던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 신학을 다 망쳐놓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주 미워했습니다. 루터는“불행하게도 아직까지 그 죽은 개에 대하여 많이 논의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킵니다. 성경 안에도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카톨릭의 주장인 본체론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이 결정된다고 보아야지 하나님은 본체상, 본질상 거짓말 할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이 곧 본체론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과 뜻을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설명을 본체론적 설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만약에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면 그것이 곧 참과 진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살인 하라고 하시면 살인이 곧 옳은 일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모든 것의 절대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개신교의 전통적인 설명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선악을 아는 일이 하나님의 배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배타적 영역을 침범 하였다고 엄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분별하실 때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보아 선악을 분별하여 판단하는 인식적 판단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나 옳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절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솔로몬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 위한 능력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구하여 받았지만 그는 곧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선이나 악을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이고 범죄입니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면 하나님께 의존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여자를 사랑하지 말고 결혼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솔로몬은 그 일을 왜 하나님이 명령한대로 해야 되는 거야. 이방 여자를 사랑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그것은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든지 법정에서는 수많은 판결들이 내려집니다. 법에 따라 판결을 하겠지만 재판관들은 자칫 잘못하면 재판관 자신이 마치 법 위에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법에 의존하여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판사 자신이 법을 임의로 해석하게 됩니다. 판사의 판결은 법을 적용하는 것이지 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판사들이 법을 임의로 해석하여 판결하는 경우가 다반사가 되었고 부끄럽게도 교회에서도 성경이나 교회법을 임의로 해석하여 적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모두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처신하는 교만이요 범죄이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자청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창 3: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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