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조찬기도회 문재인 대통령 불참으로 갑론을박한다는데...

지난 6월 17일 국가조찬기도회에 문재인 대통령이 깁짝스럽게 불참하여 그 후폭풍이 거세다. 사단법인 국가조찬기도회 지도부의 책임론이 거론되고, 심지어 법인해체론도 거론된다. 하여 본지는 지난해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한 한명철 목사의 시론을 다시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예전(禮典) 보다 위에 있는 예우(禮遇)

2018년 3월 8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 제1전시장 제1홀에서 개최된 제50회 국가조찬기도회 동영상을 보았다. 1시간 20여분이 소요되었다. 역대 최다인 5,000여명이 모였다 한다. 무대 장치가 기도회나 예배처와 달라 무척 낯설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와 의원들이 모이는 자리라 해도 기도회라는 특성상 기도회다운 분위기로서는 영 탐탁지 않았다.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기도를 위한 배치보다 식사를 위한 원탁 테이블의 진열이 눈에 거슬렸다.

기도회는 분명 예배의 형식을 지녔다. 그랬다면 대통령 아니라 그 이상 되는 인물이라 해도 예배 자리에 먼저 참석해서 예배의 시작을 기다려야 했다. 헌데 예배 준비가 다 된 후에 대통령 내외의 입장이 있었다. 예전 차원이라도 온당치 않다. 대통령에 대한 예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에 대한 예우상 당연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교회 안에서도 예배 도중에 박수 치는 정경이 흔하기에 문제 될 것이 없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주님의 보이지 않는 입장에 박수 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동정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예배(禮拜)인가 행사(行事)인가

장황한 개회사, 원고를 읽으며 기도를 하는 것이야 이해하겠지만 때때로 눈을 쳐들고 드넓은 강당을 휘둘러보며 기도하는 자세는 영 못마땅했다. 경호원들이 눈을 부라리고 카메라맨들의 플러시가 터지는 중에 입장한 것은 이 나라의 지도자 내외였지만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찾아오셨을지라도 진행되는 순서들로 인해 불편해하시다 말씀이 말씀답지 않게 선포되는 그 즈음에 등을 돌리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안정적이고 돋보이는 것은 단지 말씀 봉독뿐이었다. 그래도 때가 때인 만큼 설교에 기대를 했으나 약 25분에 이르는 메시지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찬양 일색이요 자신과 자신의 교회가 펼쳐온 사역을 과도하게 소개하는 내용은 사적 홍보 행위였지 결코 설교라 보기 어려웠다. 변사조의 언변은 거침없었으나 다만 그뿐이었다. 실로 낯이 뜨겁고 귀마저 간지러웠다.

검(劒)같은 말씀 없는 희미한 메시지

격려가 필요했다면 경고와 권고 또한 주어져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빙자하여 자신의 얘기를 풀어 놓는 전형적인 말씀의 도적 행위였다. 설교자로 선정된 기준이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회한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설교자의 역사 인식이나 정치 성향은 개인에게 속한 문제로서 그것을 탓할 수야 없지만 기독교의 목소리, 적어도 한국교회의 절절함과 주님의 마음 한 조각만이라도 담은 설교라면 좀 더 메시지 자체에 집중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공적으로 최고 통수권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다수의 의원들까지 참석하고 종교와 사회 각계의 지도층이 참석했으니 불같은 말씀, 칼같이 찌르는 말씀이 시대 정황상 더 적절한 말씀이 아니었겠는가! 메시지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어떤 열기나 반짝인 검광은 전혀 없었다. 메신저는 분명했지만 메시지가 흐릿했다. 적어도 이 나라의 교회 지도층에 예언자가 없다는 반증이라 생각하니 울울한 심사를 지울 길이 없었다.

지도자 미화에 급급한 조찬기도회

조국의 안위와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회였다면 적어도 천상의 메시지라 수긍할 만한 내용으로 다듬어져야 했었다. 실망을 넘어서 일종의 분노를 느꼈다. 한시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한국교회를 대표한 메신저가 아니었던가! 2년 전의 48회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같은 설교자가 대통령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전력을 알고서야 ‘그래서였구나!’하는 실망감에 분노심을 접었다. 그래도 아쉬움의 여운은 진하게 남았다.

50회면 희년에 해당한다. 그 제한된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메시지만 전해도 시간이 모자랐을 판인데 야릇한 설교 전개에 가슴을 쳤다. 참석자들 중에는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고자 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허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진정의 기도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없었지만 일터와 안방에서 자신의 일에 땀 흘리며, 혹은 삼천리강토 곳곳에서 실제로 부르짖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선지자의 가슴은 식고 요란한 박수 소리만

마이크가 꺼지고 경호원들에게 멱살잡이를 당할지라도 나단 선지자의 심정으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외쳤던들, 찬사만이 아니라 권고를, 격려만이 아니라 경고의 나팔을 불었더라면,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한반도에 불어 닥칠 유라굴로의 형체를 내보였더라면, 평안의 때에 전쟁을 외쳐 매국노/민족 반역자로 지탄받았던 예레미야이기를 자임했더라면, 다섯 번에 걸쳐 임한 심판의 환상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를 목 놓아 소리쳤던 아모스의 심장을 품었더라면, 하나님의 위엄과 역사 경륜 그리고 지도력의 준엄함과 사명을 전하던 사무엘의 심정이었다면 정녕 난도질당하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그 말씀’이 눈물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수 소리 요란했지만 가슴을 두드리는 천사들의 시위가 그림자처럼 그곳에 드리웠음을 느꼈다. 다툼과 싸움이 그치지 않고 반목과 정쟁이 콩 볶듯 하는 이 나라의 현실에서 가슴 치며 오열하는 무릎들이 강당을 크게 울려야 했다.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고교 시절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의미를 채 알기도 전에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기에 눈물로 밤을 새워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모습과 울부짖음이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하다.

누구를 위한 국가조찬기도회인가?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이 나라의 산중 암혈과 토굴 속에서 24시간 끊이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던 열정은 어떤 단체나 조직이 아니라 소위 은혜 받았다 하는 신자들이면 당연시하는 의무요 책임이었다. 어른이나 어린 학생이 따로 없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은혜 받은 신자의 호흡 같은 것이었다. 기도원마다 구국집회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엽이었다. 물론 지금도 기도하지만 기도 정신과 열기는 예전만 못하다.

누구를 위한 국가조찬기도회인가? 모임의 성격상 자칫 최고 지도자를 예찬하거나 특정인을 내세우기 쉽고 갈수록 정신보다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치러지기 쉽다. 혹자는 이번 50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앞서 이 모임이 적폐라 불리는 한국 보수개신교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이유로 대통령의 불참을 유도했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신앙 양심의 잣대에서 볼 때 국가조찬기도회는 영적 적폐청산의 대상이다. 국가조찬기도회를 시행하는 나라도 미국과 이스라엘 정도로 몇 나라가 되지 않으며 유독 한국의 국가조찬기도회 진행만이 정치 의례적이어서 상당히 아리송하다.

권력에 야합한 그들의 치기(稚氣) 국가조찬기도회

국가조찬기도회 이대로 좋은가? 50회 희년을 맞이하여 이 조직에 갇혀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주님을, 성령님을 풀어 놓아 자유케 해야 한다. 권력에 아부하고 지도자를 추켜세우며 영적 치기의 상징이 되어버린 국가조찬기도회는 구시대의 산물이다. 수구 보수 세력이 움켜쥔 정교유착의 금송아지 상이다. 감히 해체를 논하는 바다. 물론 이 나라가 존립하는 한, 이 나라에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국가조찬기도회는 지속될 것이다. 찬반 여론 속에서도 건재를 과시할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사람들의 목소리 드높은 곳에 주님은 침묵하심을!

50회 국가조찬기도회가 작성한 공동기도문에는 회개 문구가 있었으나 상투적인 표현일 뿐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음은 누가 보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차라리 누군가에 의해서라도 머리를 풀고 옷을 찢는 과격한 회개의 동작이 연출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은 유치함일 뿐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기 전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로 모두 숨어들어야 한다. 회개를 통한 자성(自醒)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감이다. 그것이 다니엘이 보여준 구국기도의 원형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단 9:18-19)

지도자의 편향을 견제하는 국가조찬기도회가 되어야

한국은 사상적 대립의 시기를 지나 좌우 대칭이 이미 기울어진 상태다. 보수 세력이 수적 우위를 보일지 모르지만 좌파의 결집력, 투쟁 능력과 판세 읽기는 한 수 위다. 좌우가 만나면 부딪힌다. 그래서 좌우충돌이다. 사상적 대립 때문에 민족이 나뉘는 것은 아픔이요 수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최고 통치자가 되는 순간, 이전에 지녔던 사상을 포기함이 옳다. 왜냐하면 한쪽을 택하면 나머지 쪽은 그늘 속에 지내야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치국의 도를 감히 논한다면 대통령의 통치란 펼치는 우산처럼 사방의 비를 막아주고 햇살처럼 동서남북에 차별 없이 뿌려져야 한다. 그것이 좌도, 우도 아닌 역사의 나침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민족이 나아갈 유일무이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좌와 우가 원의 중심으로 모이면 한 점에서 수렴될 텐데.......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