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Global Missions 미국지사
【오늘의 기도】인봉한 책을 펼친 그리스도(30) 용서와 속죄
  • 김수경목사
  • 승인 2018.10.20 07:56
  • 댓글 0
  • 조회수 886

계시록 8:3-9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6.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he 2nd Life Foundation뉴 욕 퀸 즈 교 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 다른 천사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께서 일곱번째 인을 떼시자 일곱 나팔 재앙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것은 마지막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모든 인생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반복적으로 말씀하는 것이다.

3절에서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는데, 이것이 모든 성도의 기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그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

지성소에 금 향로를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 한 사람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천사”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성경은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다른 천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부분을 갖고 이단들은 예수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천사'라는 헬라어 '앙겔로스'(ἄγγελος)의 뜻은 '천사' 이외에 '계시의 전달자'(messenger), '소식을 전하는 자', '사자, 사신'(envoy), 그리고 '목사'(pastor)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단어는 '가져오다'(to bring), '인도하다'(to lead), '지시하다'(to direct) 등의 뜻을 갖고있는 '아고'(ἄγω)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천사'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며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목사'의 역할도 그와 같으므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목사가 천사라는 말은 아니다. 목사나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복음을 전할 때는 '천사'인 것이며, 복음에 불순종하며 인본주의자가 되는 순간은 베드로처럼 '마귀'가 되는 것이다(마 16:23). 

'복음'을 가장 정확하게 잘 전할 수 있는 분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복음 전달자의 의미로 예수님도 성경에서 '천사'라고 쓰여진 것이지, 예수님이 피조물인 천사라는 말이 아니다. 이는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양'은 동물 중에도 미련한 동물이므로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하는 데에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본문의 장면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속죄할 정결한 동물의 피와 향을 들고 들어가서 속죄소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뵙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레 16:12-13)

'속죄'를 뜻하는 '키푸르'(כִּפֻּרִ)는 동사 '카파르'(כָּפַר)에서 유래했다. '카파르'(כָּפַר)는 '속죄하다'(make an atonement, to expiate) 이외에 '화해하다'(make reconciliation), '용서하다'(forgive), '덮다'(to cover), '자비롭다'(be merciful), '씻다'(cleanse)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속죄하기 위한 동물의 피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향을 갖고 휘장 안 속죄소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피가 죄를 대속"하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속죄소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염소의 피를 뿌려서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덮어주시고 씻어주시므로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죄로 가리워진 장벽을 허물기 위해 대제사장은 죄가 있는 상태에서 속죄소에 들어갈 수 없다. 따라서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전에 먼저 수송아지의 피를 들고 들어가서 대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의 죄를 속죄한 뒤에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염소의 피를 들고 속죄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즉 속죄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대제사장과 피를 뿌려 대속할 동물은 죄와 흠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가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고, 무흠한 동물도 있을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속양과 대제사장이 되셔서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1-12)

▶ 70번씩 7번의 용서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께서 70번씩 7번 용서하라는 말씀은 490번 즉 수없이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마태복음 18장21절에 쓰인 '용서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ι)는 '~로 부터'라는 '아포'(ἀπό)와 '보내다'라는 뜻의 '히에미'(ἵημι)가 합성된 단어로 '떠나 보내다', '당장 논의하지 않는다', '빚을 포기하다', '무시하다', '멀리 보내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죄를 범한 사람으로부터 죄를 멀리 보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용서하다'라는 용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실 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8:20).

"내 이름으로"라는 헬라어 "εἰς τὸ ἐμὸν ὄνομα"(에이스 토 에몬 오노마)는 "내 이름 안에서"(in my name)라는 뜻이다. 즉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 즉 말씀 안에서 주님의 제자가 된 두세 사람 즉 주 안에 거하는 이들 가운데 주께서 임재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라고 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말씀에 관심이 없는 이들과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특별 기도집회를 한다면서 두세 사람이 아니라 수백 수천명이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할지라도 "주여, 주여"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 즉 삶 속에서 가인처럼 자기가 주인이 되어 주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도 내쫓고 많은 권능을 행하며 살아갈지라도, 이들을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신다는 말씀과 짝이 되는 부분이다(마 7:20-23).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며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왕으로부터 탕감을 받았으나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둔 비유를 말씀하시며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하셨다(마 18:35).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그를 용서해준 왕과 일치된 마음이 아니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왕과 일치된 마음이 될 때에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용서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가져도 용서가 불가능하며 용서할 수 없기에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로 용서 못해"라고 하는 자들을 보게 된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들은 모른다.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간다는 말은 죽어서 땅 속에 묻힌다는 말인데,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고 주님의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그분의 긍휼함을 받지 못한 채 감옥살이를 하며 살아가겠다는 말이다. 지옥(地獄)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땅에 있는 감옥이다. 즉 땅에서 죽을 때까지 감옥살이 처럼 주님의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받지 못한 채 자기 힘으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며 살아가겠다는 말이다.

예전에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용서 못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그 사람이 하도 딱해서 왜 저렇게 용서할 수 없다면서 강퍅하게 살아갈까 하며 안타까와하는데 성령께서 "그는 그의 말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이가 그에게 용서받을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거할 때 용서함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그분과 관계가 있으므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므로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 용서와 속죄

70번씩 7번은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에 이루어지는 속죄를 의미한다. 유대력의 7월에 마지막 절기 셋이 있는데, 나팔절과 속죄일과 장막절이다. 나팔절에 나팔이 울려퍼지며 모든 죄인들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회개하라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그분 앞에서 죄를 회개하며 이웃간의 허물들을 서로 용서하기 시작한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날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회개하라는 나팔을 불었다. 본문에 나오는 나팔 재앙이 믿는 자들에게는 재앙이 아니라 구원의 소식이지만,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재앙으로만 느껴져서 죽을 때까지 언제 재앙이 내릴지 모를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7-38)

회개하라는 나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이들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역사가 오순절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나팔 소리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는 사건이 속죄일에 속죄받고 구원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 없이 그 누구도 회개할 수 없다.

속죄일에는 개인의 죄를 속죄하지만, 장막절에는 온 세상의 죄를 속죄하는 예식을 한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모든 족속의 수가 70으로 나온다. 그래서 70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뜻하는 수이므로 장막절에는 모든 나라를 속죄하기 위하여 70마리의 소를 7일 동안 바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7일째에 안식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것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7번째 절기인 장막절은 유대력 7월에 있으며, 7일동안 70마리의 수송아지를 바치며 마지막 7일 째에는 7마리의 수송아지를 바쳤다. 7이란 수는 질적이며 영적으로 완전한 수이며, 하늘의 수(3)와 땅의 수(4)가 합해진 수이며 동시에 인간의 수(6)와 하나님의 수(1)가 합해진 수이다.

구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동물의 피로 속죄했다. 그래서 해마다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으나 참 제물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므로 모든 제사 제도가 완성되어 더이상 속죄 제사가 필요없게 되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6-27)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하는데, 어느 누가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고 그 피가 깨끗하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겠는가? 그래서 정결한 동물의 피를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이루신 것이다. 

이는 '용서'라는 것을 인간은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속죄'의 의미를 갖고 있기에 속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므로 그분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신 말씀은 모든 열방을 위하여 7일 동안 70마리의 소를 바치는 속죄일의 속죄 제사를 말씀하는 것으로, 그렇게 속죄 즉 용서하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바쳐 죽을 수 있는 제물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받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는 평생을 갚는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것이므로 오직 용서받는 길 이외에는 그 빚을 청산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허물이 있는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그 빚을 청산하겠다며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성경에서 용서라는 것은 반드시 회개가 동반된다. 주님은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할 때에 용서하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회개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회개할 때 용서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우리에게 허물이 있는 자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에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회개하더라도 용서하지 못하고 강퍅해지는 것은 그의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베드로는 7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면서 잘난척을 하려고 했지만, 주님은 70번씩 7번까지 하라고 하셨으므로 그렇게 용서를 많이 해주어야 한다고 그 동안 가르쳐왔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용서라는 것이 인간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속죄양으로 오신 주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막절의 주인공, 장막절이 뜻하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대속하셔야만 온 인류가 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그래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8장21절에 쓰인 '용서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ι)는 죄를 범한 사람으로부터 죄를 멀리 보낸다는 뜻을 갖고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므로 그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는 말이다.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길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성막은 서쪽에 지성소가 있고 동쪽에 문이 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염소 한 마리는 죽여서 그 피를 갖고 서쪽 지성소로 들어가고, 다른 아사셀 염소에게는 안수하고 동쪽으로 보낸다. 이 두 마리의 염소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속죄일에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과를 우리로부터 멀리 옮기시고 우리를 성전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히 13:11)

▶ 뇌성과 음성과 번개(불)와 지진과 우박 

본문 5절부터는 땅에 재앙이 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계시록을 보며 공포에 떤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동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출 9:23) 

■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 19:16)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시 18:13)

■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 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사 29:6) 

■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마 28:2-3)

■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5-26)

■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계 11:9) 

이처럼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이 주님의 자녀에게는 기쁨이지만 회개치 않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재앙의 공포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지진이나 번개가 치는 것이나 우박이 내리는 것을 볼 때에 주님의 살아서 역사하심을 두렵고 떨림으로 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재앙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의 혀처럼 임하시자 수천명이 회개한 것과 천사가 불을 땅에 쏟자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성경에서 땅은 주로 이스라엘 또는 우리의 마음 밭을 상징한다. 즉 성령께서 불처럼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의 굳어지고 강퍅했던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게 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게 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많은 이들이 이 본문을 보며 땅과 수목과 풀들의 삼분의 일이 불에 타는 재앙이 임한다고 생각하며 대접 재앙은 핵전쟁이 일어나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무는 사람을, 그리고 풀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그래서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우리의 단단하고 강퍅한 마음 밭 즉 견고한 진이 부서지고 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삿 9:8)

■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겔 17:24)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마 3:10)

■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막 8:24)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 15:5)

■ 그러므로 그 거한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저희는 마치 들의 풀 같고 나물 같고 지붕의 풀 같고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 같으니라. (왕하 19:26)

■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6)

죄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은 수많은 이적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믿음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셨으나, 믿는 이들보다 믿지 않고 주님을 죽이려고 마음이 더욱 강퍅해지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영적인 세계를 알리기 위하여 실제로 인생 중에서 지진이나 번개나 뇌성 등의 자연 현상을 통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해야할 여호와 하나님을 알리고 계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자연 현상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므로 영생을 누리지만, 자연 현상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임재가 반갑지 않다. 종교인들에게 주님의 임재란 지진과 번개와 같은 공포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재앙과 심판이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거짓 선생들이 베리칩부터 시작하여 말세에 임할 재앙 이야기(아마겟돈 전쟁 등)를 떠들면서 주께서 주시는 평안과 반대로 세상이 주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 불붙는 큰 산

8절과 9절에는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속의 생명체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는 재앙이 일어난다.

성경에서 주로 '산'은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던 예루살렘 성전이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으로 변하므로 계시록 11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을 영적으로 "소돔" 또는 "애굽"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겔 8:6, 16)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지었으나, 그 성전 안에서는 온갖 가증한 일들이 행해졌다. 하나님과 태양신을 같이 숭배하며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여 인간이 성전을 지을 때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 성전들을 무너뜨렸으며, 마지막 헤롯이 지은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허물어뜨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2)

예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기 위해 오셨다. 왜냐하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성전이신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더이상 그림자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성전이 무너지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인류의 종말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주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으시고, 손수 우리를 성전으로 만드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신 것이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막 14:58)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6-50)

죄인들이 지은 성전은 가증한 것들로 가득 찼으며,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 또한 감람산의 남쪽 부분에는 솔로몬이 그의 후궁들을 위하여 우상들의 산당들을 세웠기 때문에 그곳을 '멸망산'(Mount of Corruption)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예레미야 51장에서는 바벨론을 '멸망의 산'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또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예루살렘 앞 멸망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왕하 23:13)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렘 51:25)

따라서 8절에서 불붙는 큰 산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다는 것은 멸망의 산이며 불탄 산인 바벨론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멸망산으로 부른 감람산 맞은 편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다 즉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말씀한 것이며, 그 말씀대로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불에 타서 전소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B.C. 586년에 바벨론이 쳐들어 와서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웠으며, 제2의 성전도 로마에 의해 불에 탔는데, 두 성전 모두 아빕월 9일 같은 날에 불탄 산이 되었던 것이다.

김수경목사  kimsoogyung@gmail.com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수경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