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60-69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호수라고도 하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셨습니다. 그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예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된 오병이어의 표적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복음서를 참조하면 본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참조,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배경을 보면,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전, 사도들이 예수께 자기들의 사역을 보고합니다. 또한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적한 빈 들에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 곳에 계신 것을 알고 여러 고을로부터 또 다시 걸어서 따라온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주의 제자들은 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오고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막 6:31).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셨기 때문에 피곤하셨습니다. 주님도 쉴 시간과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벳새다로 온 것인데 또 다시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그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눅 9: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무렵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는 큰 무리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고려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배려하는 사랑입니까?

예를 들어, 제가 하루 종일 일을 한 후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교사가 연락을 해서 어떤 가난한 불신자들이 있는데 심각한 불치의 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잠시도 쉬지 못해서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식사를 못해서 배고픈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재를 다 털어서 그들을 식당으로 데려가서 배불리 먹였습니다. 만일 제가 이렇게 행했다면 이 얼마나 배려가 많은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주를 따라온 그 무리가 배고플 것을 아시고 그들을 먹일 계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6). 

이 질문은 이미 예수께서 그 무리를 기적으로 배부르게 하시리라 계획하신 후에 일부러 물으신 것입니다. 즉, 빌립의 믿음이 어떠한지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이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지금 그곳에 모여있는 무리는 장정만 5천명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 빌립의 답변은 예수님의 질문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신 것은 “이들을 먹일 떡을 어디서 사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고, 빌립은 “돈이 부족합니다.”라는 답변이었습니다. 즉, “어디서라니요, 돈부터 계산해야지요. 이들을 먹일 돈이 우리에게는 없답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여기서 빌립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에 빠져 하나님의 능력을 고려치 못한 경우에 속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계산에 빠져서 하나님을 불신하는지요? 그래서 죄를 범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재정이 맞지 않습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게 됩니다. 또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죄를 짓더라도 돈을 벌어서 내 힘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주께서 신자들을 향해 던지는 전형적인 시험입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를 내게 맡길 수 있느냐 하는 시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빌립처럼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시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며 근심과 염려에 빠집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한 아이로부터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이때 안드레의 말투를 보면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니이까?”

여기서 신기한 것은 그 아이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건네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처럼 하늘로부터 떡을 내려오게 할 수 있었지만, 작은 아이가 건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여 그 큰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는 아무리 작은 헌신이라도 믿음으로 드려진 헌신은 하나님 나라에 위대하게 쓰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빌립과 안드레의 불신앙을 꾸짖지 않으시고 조용히 간단한 부탁만 하십니다. 
“이 사람들로 앉게 하거라.”

그리고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십니다. 그런데 떡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또 나눠줍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의 그 떡 다섯 개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무리를 실컷 떡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물고기도 그렇게 하여 그들이 원대로 먹게 하셨습니다. 그 아이도 배불리 먹었고, 장정 5천명 뿐만 아니라 그곳의 모든 남녀노소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먹다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께서는 주를 따르는 자들을 결코 굶기지 않으십니다. 충분하게 먹이시며 배불리 먹이십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의 배를 채워주시는 일은 그분께 전혀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께서 의도하신 것은 그들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주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눈이 감겨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즉, 그 큰 무리가 주를 따르는 목적은 매우 유치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또한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죄 사함 및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들의 육체의 궁핍과 갈증을 채우고자 주를 따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따라온 자들은 평소에 그들 나름대로의 메시아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메시아관은 오랜 구전과 전통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지녔던 메시아관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민족 이스라엘의 교만과 착각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경제 메시아 및 정치 메시아였습니다. 하늘의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무한하게 풍성히 먹이실 메시아!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 위에 이스라엘 민족을 최고로 세우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유치하고 세속적인 메시아관에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딱 맞아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합니다. 즉, 모세가 주의 백성에게 예언하여 준 그 선지자라고 인정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그들은 모세의 뒤를 이을 또 다른 그 선지자를 기다렸는데,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사람들을 먹인 기적을 ‘그 선지자’가 나타나 40년이 아니라 영원히 먹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은 그들이 가진 세속적이고 파렴치한 이기적인 그릇된 메시아관에 따라 그들이 임금이 되실 수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시고 일단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이처럼 그들은 메시아에 대해, 그리고 그로 인해 이 땅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그릇된 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병을 고쳐주고 떡과 권력을 주실 ‘그 선지자’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그들은 예수님을 주로 모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왕이 되기를 거절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즉,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어려움까지 배려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주를 따를 때 반드시 어떤 상황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며, 또한 배불리 먹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목적을 위해 주시는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은 굶주린 우리에게 육체적인 떡을 주십니다. 외로운 자들에게 가정을 주시고, 병환이 있는 자들에게 건강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주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4, 30-33)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들을 배불리 먹이시니 이제 그들은 더욱 예수님을 따르되 건강하기 위해, 그리고 배부르기 위해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즉, 수고하지 않고 배부를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는 그런 유치한 목적이 아니라 더 숭고하고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같은 뜻입니다. 단지 메시아는 히브리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약에서는 메시아관이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관입니다. 관이란, 내가 믿는 내용을 말합니다. 즉, 지금 여러분이 그릇된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과 별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할 경우 실제로 예수님은 여러분의 왕이 되기를 거절하십니다. 이 말은 어떤 그리스도관을 갖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며 또한 어떤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행여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 고백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구원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입니다. 

한편, 그릇된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병을 고쳐주시고 떡과 음료와 권력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즉, 세상에 속한 것들과 연관된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실제로 세상에 속한 것들과 무관하시기에 그들의 주가 아니십니다. 이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3-4).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무관하며, 따라서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과 무관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일용할 양식 및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자상한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그분의 그리스도 직분은 영원한 것들을 위함이며, 무엇보다 우리와 하나님의 교통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우리가 지음을 받은 근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을 누림이며, 영생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왕되심을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또 찾아왔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깊은 마음을 아시고 뚜렷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27). 

자, 우리는 여기서 이 무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 무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 기적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이 가진 신앙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가운데 큰 권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의 바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인데, 영생의 말씀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행하신 기적을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은 원어로 (세이메이온)인데 어떤 메시지를 알려주기 위한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시고, 그 후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게 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죄사함과 영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으로 예수님을 따를 경우 반드시 멸망할 수 밖에 없기에 예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요 6:27)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의 본질을 전하십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요 6:27).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라”(요 6:27). 

그리고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입니다. 즉, 성령으로 인치시고 메시아로 보증하신 분입니다.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그러자 그 무리는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율법주의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즉, 여전히 이들은 내가 무엇을 행하여 구원을 얻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 
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하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놀랍게도 믿음을 갖기 위해서 또 다시 기적이 필요하다며 기적을 요구합니다. 즉, 그 무리는 주의 말씀에 의해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현상에 의해 믿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그러면서 여전히 배불리 먹이시는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 6:30-31)
즉, 그들은 “우리를 모세처럼 평생 배불리 먹여 주셔야 우리가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 
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산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하여 얻는 영생의 떡인 줄을 알지 못하고 그저 40년 광야의 만나처럼 평생 거저 먹을 수 있는 떡인 줄 알고 (판토테), 즉 “항상” 그 떡을 주소서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우리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은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25).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 6:5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5-57). 

오직 주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인 줄을 믿게 하기 위함이요, 그 이후에는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과 우리가 영적으로 연합하면서 주의 죽음으로 인한 무한한 은혜와 거룩한 생명을 한량없이 얻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부활 승천과 함께 보내실 성령에 대해서도 암시하십니다. 성령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주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게 하실 것이며, 마지막 날에 우리 주께서는 그들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요 6:62-64). 

이에 참 신자를 대표하는 시몬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그러나 무리들은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은 후에 자신들의 취향과 다르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납니다. 놀랍게도 먹을 것과 병 고침을 위해 따르던 그 많던 무리들이 진정한 복음을 듣는 순간 순식간에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에 의한 병고침과 풍요와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거룩하게 하는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아마도 한국 교회의 신자들이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교회를 떠날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영생을 주는 진리보다는 당장 누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리석은 인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보다 세상의 것을 붙들기 위해 주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우리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람들에게 1억 받고 지옥갈래? 천원 받고 천국갈래?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1억 받고 지옥 가겠다고 달려들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그러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지옥에 떨어질 죄를 범합니까? 돈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미워하고 믿음을 저버리고 양심을 팔아먹지 않습니까? 이는 천국보다는, 영생보다는, 당장 이 땅에서 누릴 떡을 더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지금 이 자리에 왜 앉아 있습니까? 참으로 천국과 지옥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영광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아닙니까? 어려울 때 예수님께 기도 드려보았는데 그때 주께서 주신 떡 때문에 계속 더 많은 떡을 얻고자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주 예수님의 답변은 영생을 위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영생과는 무관하다고 알려주십니다. 

이 시간 이러한 의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바랍니다. 내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예수님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나아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가 되어도,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죄를 미워하고 죄를 이기기 위해 예수님을 믿어야 그것이 참 믿음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말씀이며, 거룩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거룩하고 영원한 사랑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거룩하고 참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는 겸손하지 않은 자는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 속한 소망과 우상을 버린 자들만이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복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미련을 둔 사람은 참 믿음을 소유할 수 없으며, 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주의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시작됩니다. 즉,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할 때만이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살과 생명의 피를 마시면서 그분의 생명을 얻어 주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며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킨다는 뜻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이러한 변화만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바른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 거하는 상태이며 따라서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오직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영접하여 하나가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참 믿음이 될 것이고, 그 믿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의 세계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그 마음이 탐욕과 죄와 반역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1-2).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영생을 누리고자 한다면 마음을 지극히 낮추고 주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를 구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바랍니다. 
“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죄와 교만 가운데 있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여, 거룩하신 그리스도시여, 저의 왕과 제사장과 말씀이 되셔서 나의 삶을 이끄소서. 저는 온 마음으로 주를 따르겠나이다.”

“주를 따르기 위해 세상의 명예와 부귀와 건강과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나를 위해 생명을 던지시고 보혈 흘려주신 주를 믿고 따르렵니다. 주여, 저의 주인이 되어 주소서.”

오직 이러한 진실한 믿음과 고백을 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이며, 이 땅에서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요, 그리고 주님의 재림 때에 영광의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도 배불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속한 그러한 것을 더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주의 표적을 맛보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참된 믿음을 소유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밤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주십니다. 얼마나 많이 주셨는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4-6). 

그런데 이 후로 베드로가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혹은 잡은 물고기를 세면서 너무 흡족해 했습니까? 그러했다면 그는 거짓 제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참조, 눅 5:8, 11). 
 
우리의 믿음은 썩을 고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진실한 교제에 있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연합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과 감사와 거룩함과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의 무한한 가치를 찾아 누리는 것! 바로 그것이 영생이며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누구나 성삼위 하나님께 존귀과 영광과 감사와 경배를 영원토록 드리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과 함께 썩어질 것을 위한 믿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영원한 거룩한 나라에 우리의 믿음이 있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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