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블루오션은 “여호와께 성결”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교회조차 레드오션으로 만드는 사탄과 맞서라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의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한(R. Mauborgne) 교수가 2005년 발간한 <Blue Ocean Strategy>는 경쟁위주로 이루어진 기존의 시장인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경쟁자가 없는 블루오션의 새로운 시장공간을 열어야 한다는 기업경영의 혁신에 관한 책이다. 위키 백과는 블루오션을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는 경영전략”으로 정의한다. 레드오션이 이미 알려진 시장공간임에 비해 블루오션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시장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블루오션을 성공적인 경영전략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경제적 군벌(tycoon)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경쟁 없는 블루오션에서의 독주는 이득 창출의 기회이지만 후발주자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결국 경쟁의 와중에서 선두를 지키려는 과도한 몸싸움이 급격한 적조 현상으로 블루오션을 변질시킨다. 레드오션의 피 터지는 경쟁 현장에 전력투구하던 이들은 용감한 개척자가 외로운 사투를 벌인 끝에 블루오션의 물길을 크게 되면 너나할 것 없이 방향을 튼다. 경쟁 없는 블루오션을 경쟁으로 뜨거운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독주 의지 때문이다. 결정적인 ‘한방’으로 영역 싸움에서 꼭대기를 차지하고픈 의지는 결국 레드오션의 망령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싸움에서 승리 집착의 배후에는 맘몬이 버틴다. 선의의 경쟁이란 미명을 내걸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승리를 위한 악의로 가득하다.

지옥의 레드오션을 물리칠 천국의 블루오션

맘몬의 붉은 기운은 우주에 가득하다. 맘몬의 영에 사로잡히면 청정했던 영혼의 해변마다 적조 현상이 급속도로 퍼져간다. 사탄은 맘몬의 영을 앞세워 싸움에 이골이 난 악령들을 대거 파견하여 교회의 뿌리를 갉아먹으려 발버둥을 친다. 아간이 탐욕의 원조는 아니다. 에덴동산에서 탐스럽기도 한 그 열매를 바라보던 그 눈길, 따서 한 입 크게 베어 물던 그 동작,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욕망의 검붉은 의지, 그것마저 북극 집회의 보좌에 올라 하나님과 비기려 하던 새벽의 아들에게서 비롯된 탐욕에 기원을 두고 있다. 탐욕은 모든 더러운 싸움이 시작되는 온상이다. 과도한 성공이 집착이 되고 의지가 되면 수정같이 투명하던 영혼도 붉게 물들기는 한 순간이다. 그들의 열정은 붉고 언어도 붉고 행동도 붉다. 붉은 피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탐욕으로 인해 적조현상의 불길이 검붉도록 세차다. 이에 반해 천국은 욕심이 사라진 블루오션이다. 교회는 “영적 블루오션”의 발원지다. 모든 교회는 경쟁상대가 아니다. 이기고 싶은 호승심을 내버림에서부터 교회 안에 뿌리내린 적조현상을 극복하는 길이 열린다.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블루오션의 그 청정한 기운을 잃어서는 안 된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며 교회의 순전함을 스스로 지켜야만 영적 전쟁에서의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교회끼리 경쟁하려는 저급한 쌈박질의 영에서 놓여야 한다. 경쟁보다 더 시급한 것은 레드오션의 사탄과 벌이는 싸움이다. 싸움꾼인 그들과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기에 이기려면 먼저 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국교회여 탐욕의 영을 벗으라

언제부터인가 승자독식의 경쟁 논리가 번영과 확장의 구호 아래 교회 안으로 버젓이 들어왔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보였던 양보가 조롱의 대상이 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는 어리석음으로 치부되었다. 충혈된 눈빛에 번득이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다. 거룩한 비전은 모조품에 밀려나고 순박한 꿈은 야망의 짓눌림에 압살 당했다. 성공만 하면 그 과정에서 벌인 추태와 악에 면죄부를 주는 풍토가 민족의 정기를 마르게 하고 교회의 도덕성을 파괴시켰다. 오인된 목표설정으로 인해 목적의식을 상실한 사람들은 동력을 상실하고 조류에 밀려가는 거선처럼 무기력한 모습뿐이다.

해도도, 나침판도, 하늘의 북극성마저 잃어버린 채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존재의 황망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빨리빨리의 성장주의, 다고다고의 이기주의, 쓱싹쓱싹의 한탕주의, 끼리끼리의 파벌주의가 할퀴고 간 자리에 남는 것은 긴 한숨과 두터운 탄식소리 뿐이다. 교회는 탐욕의 영을 한사코 벗어나야 한다. 욕심으로 무거워진 영혼은 비상은커녕 수월한 보행조차 힘들다. 가벼운 영혼이 탄력을 받으면 홍해도 가르고 요단도 건너고 파란 능선을 지나 푸른 하늘까지 난다.

 

교회의 블루오션은 세상과의 차별인 ‘성결’

크리스천의 블루오션 전략은 “여호와께 성결”을 이루는 것이다. 성결의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와 말씀의 깊이를 확보함에 있다.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갱신에서 홍해의 레드오션은 갈라지고 가나안의 블루오션으로 진입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갈대아우르의 레드오션을 떠나 약속의 땅이라는 블루오션의 푸른 물길을 보았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거룩한 야성을 키우고 영성의 든든한 뿌리를 확보함으로 이 길을 텄다.

바울은 율법주의의 적조현상에 갇혀 오랜 기간 미몽의 세월을 보냈지만 다메섹에서의 경험에 연이은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3년 체재로 십자가와 부활의 블루오션으로 급선회했고 새로운 전략의 대가가 되었다. 신대륙으로 눈 돌린 콜럼버스는 유럽 국가들 간의 피 터지는 살육의 현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망망대해를 헤치며 목숨을 건 항해 끝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 천성 길은 열린다. 한국교회는 교회간의 반목과 목회자들의 보이지 않는 경쟁과 암투로 인해 심각한 적조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가 블루오션을 회복하지 않으면 거룩한 백성이 건너야만 할 홍해는 갈라지지 않은 채 전진하려는 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교회의 적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자신

상대와 싸우지 않는 자는 전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상대로 싸운다. 자기 속에 있는 적조 현상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청정한 블루오션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혁신에 목숨을 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흘리는 것은 피가 아니라 땀이다. 자신이 창조적 싸움을 위해 흘린 땀방울의 양이 이 싸움에서의 승패를 결정한다. 내면의 적조현상을 야기하는 모든 배후에는 반드시 탐욕이 엉겨 붙어 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의 5중악을 언급하면서 마지막 악인 탐심을 우상숭배로 부연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면 영혼은 더없이 가볍다.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성령은 무게가 없다. 사람의 영혼도 욕심의 거품을 죄다 제거하면 무게 없는 영, 깃털보다 가벼운 영을 소유하게 된다. 매전필승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에 따르는 피해 또한 적지 않다. 전쟁에서의 모든 승리에는 병사들의 피가 땅에 스미고 강을 물들이는 희생이 있다. 부전이승(不戰而勝)이 귀한 이유는 양편 모두에게 희생이 없다는 점이다. 사탄은 싸움을 부추긴다. 승리의 마력을 알기 때문이다. 승리에 취하면 희생을 잊는다. 아무리 작은 승리에도 희생의 대가는 값비싸다.

혼돈속의 질서 ‘카오스모스’

프랑스 파리8대학의 교수였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혼돈의 질서”(chaosmos) 개념을 소개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까지 소급되는 카오스모스는 카오스 내에서 코스모스로 이행하는 과정의 중간단계를 뜻한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서로 다른 이원적 체제가 아니라 카오스를 코스모스가 배태되는 원형질로 이해한 것이다. 난삽한 설명을 차치하고 나는 이것이 혼돈적 질서 또는 혼돈 속에서의 질서란 의미로 이해한다. 코스모스의 최종형태가 아메바처럼 원형질의 상태로 숨어 있는 것이 카오스다.

카오스는 모든 정적의 요람이지만 질서를 잡기 이전의 혼돈을 뜻하기에 사실은 무질서의 흐름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 저녁은 아침이 태어나는 요람이다. 혼돈은 죽은 상태가 아니다. 삶을 향해 고개를 내미는 알 속의 생명체로서 용암처럼 꿈틀대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형식을 갖추었을 때 우리는 코스모스라 부른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했지만 죄가 다시 코스모스 속에 카오스를 불러일으켰다. 세상은 모든 것이 혼동되고 혼란스런 사회현상에 넌더리를 내며 혼잡한 세계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새 세상이 오기까지 그것은 불가능하다.

 

혼돈의 세상 속에 핀 코스모스

필자는 자라나면서 많은 꽃들 중에서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가 짙은 것도 아닌데 유난히 코스모스를 사랑했다. 미국에서는 코스모스를 볼 수 없다. 언젠가 코스모스 씨를 구해 화단에 뿌려 연분홍과 진분홍, 그리고 하얀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기쁨을 잠시나마 가진 적이 있다. 한국의 초가을이면 길가 어디서나 피어나던 코스모스가 그립다. 창조의 순간을 잠시 들여다보라. 최초의 혼돈과 공허함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신이 운행할 이유가 없고 그랬다면 모든 것이 형체를 갖고 제자리를 잡는 코스모스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칠흑같이 어둔 밤이 새벽 먼동의 모태가 되듯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산실이다. 세상의 부조화에 인위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려 하면 독재라는 괴물이나 조지 오웰의 <1984년> 같은 전체주의가 생긴다. 청자연적은 한 끝이 구부러져 아름답다. 눈썹 없는 모나리자의 미소는 신비롭다.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의 모든 부조화와 무질서, 혼돈과 공허함은 하나님의 성령을 부르는 아우성이다. 성도에게는 화합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다. 코스모스의 영이다. 사탄은 인간의 영혼을 카오스의 구체제로 다스리려 하고 성령은 영혼을 코스모스의 신체제에 적응시키려 한다.

 

레드오션을 지나 블루오션으로 나가는 교회

세상은 불완전해서 구원의 대상이 된다.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주님은 로마당국에 체포되거나 유대당국자들의 사주에 따른 십자가형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십자가를 통한 인류구원의 역사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어거스틴은 “오, 축복받은 죄!”라 표현했다가 중세에 유다지지주의자로 오해를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범죄 하지 않고 온전함을 유지함으로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지었다 용서받음으로이다. 무죄한 상태에서의 하나님 사랑은 인류의 공통된 경험이 아니고 타락 이전에 첫 사람들이 잠시 맛보았던 경험이다. 우리는 그 상태를 전혀 모른다. 레드오션을 뒤로 하고 블루오션으로 진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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