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안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인프라는 가정이고 그 다음은 국가입니다. 가정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고 국가는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은 아니고 인간 타락 이후에 생겨난 제도입니다. 국가는 인간에 의해 생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 혹은 나라 개념은 인간 타락 이후 가인이 살인을 저지르고 누군가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하며 성을 쌓은 것이 최초의 원시 국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을 쌓은 이유가 누군가 자기를 해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데, 그 두려움은 자기가 저지른 죄의 결과이고 성을 쌓은 것은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대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이 타락으로 인하여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가인에게 아주 특별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현상은 그를 위협하거나 공격하려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자기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누군가 자기에게 나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두려움은 물리적인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가인의 인생 진로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죄 때문임을 알았다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쪽으로 나가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계속 자기 방식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삶의 방식은 자기 동생을 살해한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가인의 뒤를 밟아 가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어떤 소년이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도전하는 자는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도전자를 죽이고 그러한 살인 행위를 정당화 하는 시를 짓고 노래를 하게 됩니다. 소위 오늘날로 말하면 그것이 문학이고 예술입니다. 국가가 생겨나게 된 것이나 인간관계를 긴장이 심화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나 하나님을 떠나고 자기 방식대로 계속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 문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 다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결과입니다.

가인이 지은 죄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은 없었을까요? 타락하고 죄를 지은 가인이지만 그가 회개하면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셨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살해하고 난 후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쫓아내신다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는 필경 누군가의 공격에 의해서 죽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가인이 직접 자신의 그러한 심경을 하나님께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말을 들으시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그 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도 가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해주시는 안전보장입니다. 두려움의 문제, 누군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가인이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동생을 살해했지만 회개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 대목이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제 가인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 진로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는 길을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정말 불행하게도 가인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인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 불신이 바로 죄의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까 하나님 앞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몹시 싫어하시지만 가인이 동생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그와 같은 배려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인간 불행의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과 국가가 안전하지 못한 것이 이런 원인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성을 쌓고 국가를 세우고 부국강병을 이룬다고 한들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이 시장이나 극장이나 폭력배들의 패싸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가정들이 모여 성을 쌓고 국가를 세우고 경제를 부흥시킨다고 한들 안전할 수 없습니다. 핵무기나 미사일 같은 군사력 가지고 형제간의 살인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경제를 부흥시키고 문명을 발전시켜도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살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고 그 방식의 극단적 형태가 살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아무도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겠다고 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 앞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도전하는 자는 죽이고 그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문명을 스스로 위대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불신자는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인간과 역사와 문명에 대해 성경적 평가를 통해 대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과 그들이 이룩한 문명은 명백하게 불신앙 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속하시려는 계획을 이루어가시고 계시기 때문에 참고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타락 이후 인류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구속의 완성 때까지 마치 집행 유예의 기간을 보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국가의 안전보장은 하나님의 지켜주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공부하면 이러한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때 평안하고 안정을 누릴 수 있음을 거듭 거듭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죄의 영향으로 점점 더 악하게 변하였습니다. 라멕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고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죄를 지은 인간은 죄의 영향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영향력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다가 그 벌로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나라는 망하고 민족은 포로 되어 간 사건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은 서둘러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제사를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이 제사 드리러 성전으로 올라갈 때 시편 127편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가정도 국가도 경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헛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한 사실은 400여 년 전에 솔로몬이 깨닫고 전도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시편 127편을 암송하여 그 교훈을 되새겼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잠’은 메타포입니다. 즉 은유입니다. 잠은 안식이고 평안이고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나 사회주의나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잠은 건전한 가정의 조건과 부국강병과 경제적 부유함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성실하게 노력하면 누구나 안전을 보장 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해 지고 가정적으로 행복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자에게나 부지런 한 자에게나 머리 좋고 능력 있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려고 성경을 읽고 공부합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사랑 받는 방법을 찾아내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한 노력으로 특징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조건이 딱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 조건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조건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그 조건은 무조건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 대다수가 시편 127:1-2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헛된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학력, 실력, 성실함, 재능, 경력, 외모, 재력...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해서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다들 그것으로 평가합니다. 스펙이나 실적이나 물리적 규모로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큰 교회 목사님은 훌륭한 목사님이 현실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김홍도 목사님, 김삼환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을 훌륭한 목사님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교회 목사님은 훌륭한 목사님이라는 평가는 세상적 평가입니다.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할 것 없이 현실적으로 사람의 영향력은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돈의 볼륨에 비례합니다.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총회와 노회와 교회입니다. 미국인들이 돈에다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써 놓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믿는 것처럼 목사님들이 늘 성경을 가르치면서 돈의 능력을 경건의 능력보다 선호하는 것을 총회와 노회와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될 때마다 속이 상하고 안타깝습니다.

인간의 안전보장은 인간의 능력이나 성품이나 조건에 따라 보장 되거나 안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조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능력과 조건은 헛되다는 사실을 알고 처신하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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