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 개교에 즈음하여

『교회 상속을 위한 신학교육과 우리의 자세』

                                       이광호 목사(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 교장)

   우리는 현 시대가 교회에 지운 짐의 무게를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지구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신학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에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가운데는 대형 신학교가 있는가 하면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군소신학교들도 많이 있다.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세속국가의 인가를 받아야만 정식 신학교인 양 착각하는 경향이 짙다. 즉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부가 인정하는 학위를 주고받는 것을 두고 신학교의 정통성 여부를 판가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권위를 뒤로 한 전형적인 세속화의 증거가 될 따름이다.

참되고 올바른 신학교는 참된 교회로부터 세워지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 외적인 규모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학자들이 신학을 가르치고, 설령 일반적인 학업이 우수한 학생들을 수백 명 모집해 신학 수업을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신학사상이 유포된다면 결코 올바른 신학교라 말할 수 없다.

현대 한국의 신학교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경 말씀의 본질적인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신학적 자유주의에 빠져 있거나, 교회보다 세상의 평가를 더욱 중요시 여기는 세속주의, 그리고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배격하는 은사주의 사상에 함몰되어 있다. 외형상 보수주의와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다수 신학교들조차 그 근본 개념을 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 자신이 처한 시대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와 전반적인 기독교 현실을 포함한다. 우리 시대의 세상은 더 이상 끝을 보기 어려울 만큼 악할 대로 악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정직한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이는 세상 역사의 끄트머리에 선 사탄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런 위기의 현실 가운데서 장차 교회를 상속해 가야할 다음 세대를 심각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우리는 ‘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이는 개인이나 소수 몇 사람의 판단과 의지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요청과 허락에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대다수 신학교들이 ‘교회를 위한 신학’을 포기하고 있는 시대적 안타까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인 것이다.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신학이 실종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신학과 신학자들은 교권의 시녀가 되어 교권주의자들의 횡포 앞에서 덩치만 클 뿐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 있다(사56:10,참조). 그러다보니 신학은 교회적 적용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이론의 장이 되어버렸다. 종교 사회적인 냉소주의에 빠진 신학자들이,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고 보존하기 위한 신학이 아니라 개인의 업적을 내세움으로써 천박한 신학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신학교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바에 따라 묵묵히 걸어가고자 한다. 장래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거칠어져 간다고 해도 남은 자들의 올바른 신학은 참된 교회의 상속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일은 천상에 계시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뒤따라오는 시대의 교회를 위해 앞서 존재하는 교회가 책임을 절감해야 한다. 참된 신학은 교회를 향한 올바른 신학적 원리를 제공하기 위해 혼혈의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 신학이 타락하면 다음 세대를 위한 참된 교회 상속이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된 신학이 참된 교회의 상속을 중단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로 인해 거짓 교회가 다음 세대를 주도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악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그에 연관된 몇 가지 현실적 상황을 짚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처한 시대와 이 땅에 존재하는 주의 몸된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첫째, 교회 교사로서의 목사에 대한 이해

교회로부터 세워진 건전한 신학교는 원래 교회를 상속하기 위한 목회자 양성에 직접 연관되어 있다. 목사는 지 교회 가운데서 공 예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들을 교육하도록 허락받은 교사이다. 그 교사는 개인의 종교적인 취향이나 구상 능력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바에 기초하여 공적으로 설교하며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상속을 위한 조직상의 중심에는 항상 말씀을 맡은 교사인 목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직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적 우위 때문이 아니라, 매주일 공 예배에서 목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그 선포가 예배에 참여한 성인 회중과 그 자리에 함께 한 나이 어린 성도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말씀 선포가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향한 미래지향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역사적 상속을 이어온 참된 교회들은, 그 표지를 언급할 때 순수한 말씀 선포와 올바른 성례의 시행, 그리고 정당한 권징사역을 강조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은 목사의 직분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일 목사가 공 예배 시간에 선포하는 말씀 가운데 거짓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 교회는 종교로 치장된 거짓 무리가 되고 만다. 목사 한 사람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특정한 지 교회가 거짓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회중 앞에서 올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항상 텍스트인 성경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하여 신학교에서는 심혈을 기울여 계시된 말씀을 체계적으로 학습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둘째, 독립적 기구를 갖춘 교단의 신학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관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교단이라면 신학교육 기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는 독립된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들 간에는 계시된 말씀을 통한 신학적 정체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각 교단 내부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관한 기본 개념이 허물어지게 되면 참된 고백은 사라진 채 천박한 외형적 조직체만 남게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교단과 그에 속한 신학교는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말하는 훈련을 지속해야만 한다. 즉 인간의 이성과 종교적인 경험에 따라 교회를 논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중심에 둠으로써 전체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배들은 항상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강조했으며, 문자적인 부분해석에 따르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중심에 둔 이와 같은 원리를 소중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을 인간들의 종교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적 도구로 삼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이는 오직 성경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는 사실과, 참된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참된 신학은 끊임없이 변천하는 세상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은 지속적으로 변천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세상에 속한 인간들은 과거부터 누적되어 온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나가기를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계시된 성경말씀을 배경으로 한 신학적 연구는 그 가운데서 진행되어 간다. 따라서 변천하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는 일반 역사적 여건과 상관없이 그 본질을 지켜나가야 한다. 신학은 그와 같은 세상의 속성을 간파하고 정당한 해석을 가하는 가운데 끊임없는 목소리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볼 때 신학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아 학문적으로 상향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즉 4,5세기 신학과 16,17세기 신학에 비해 현대 신학이 더 발전한 것으로 말할 수 없다. 도리어 인간들의 두뇌를 배경으로 한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발전에 부딪쳐 퇴보하는 경향성이 짙다.

참된 신학은 변천하는 세상 가운데서 교회가 올바른 균형을 잡으려 할 때 발생하는 결과로서 그 기능을 감당하게 된다. 즉 신학은 어떤 시대라 할지라도 교회를 온전히 지켜 보전하는 변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참된 신학은 오직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을 위한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자세 또한 그 범주 안에 존재해야 한다. 이는 교회를 위한 의미 이외에 다른 세속적인 목적을 둔 신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신학은 항상 지상교회의 상속을 도모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상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 승천 후 강림하신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지상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서 주님의 재림 때까지 상속되어 가야 한다. 따라서 모든 가시적 교회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끼어 존재하면서 그 맡겨진 책무를 감당하게 된다.

교단의 신학교는 이에 대한 온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중추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이를 위해 모든 구성원들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사탄은 지상 교회의 원활한 상속을 가로막기 위해 각 시대마다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사탄에 속한 사악한 세력은 교회의 올바른 성장과 상속을 훼방하기 위해 세속화를 꾀하고 있다. 나아가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키기 위해 어리석은 자들을 미혹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애쓰고 있다.

확실한 점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교회가 지속적으로 상속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인들의 노력과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거한다. 또한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교회의 상속이 이루어져 가게 된다. 이는 인간들의 인위적인 열성이나 종교적인 집단 활동이 교회의 상속을 위한 본질적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 현대 신학교육의 문제점

현대 신학과 신학교육의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학문의 지나친 분화가 가져온 역기능이다. 우리 시대는 모든 학문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다. 고대에는 철학과 신학 정도로 나뉘어져 있던 것이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져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일반 학문 분야 뿐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가운데 큰 줄거리만 언급한다고 해도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적용신학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것이 또다시 세분화 되면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분야들로 나누어진다. 현대에는 지나치게 미세한 한 부분을 전공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희소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에 있어서 그와 같은 형편을 결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전체 숲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나뭇가지나 작은 나뭇잎 하나를 붙잡고 평생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진짜 중요한 본질을 놓칠 우려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별히 유념해야 할 바는, 참된 신학을 위해서는 기록된 성경과 더불어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환경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건전한 신학자들은 미시적인 안목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서 각 전공 분야를 교회를 위해 하나의 개념 속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많은 연구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학 실종의 국면을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대다수 신학교에서는 학자들이 마치 모자이크 맞추듯이 신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구약신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조직신학이나 역사신학에 대해 지극히 빈약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조직신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신약신학이나 적용신학을 멀리하거나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와 같은 신학방법론은 결코 올바른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모든 신학자들은 전공분야와 상관없이 성경 전체와 그에 근거한 굳건한 지식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신학 내부의 각 전공분야들 사이에는 성경을 매개로 한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로부터 분리되거나 간격이 생겨나게 되면 소위 말하는 전공마저도 제대로 된 전공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근세 이전의 신학자들을 비롯한 과거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특정 분야의 전공이라는 식의 학문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속사도들이나 교부들은 각각 자신만의 특별한 전공분야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기독교 초기의 이레네우스나 어거스틴, 중세의 위클리프나 후스, 그리고 종교개혁시대의 루터, 츠빙글리, 부써, 칼빈 등은 특정 신학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라 신학 전반을 잘 이해하고 있던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적용신학 등 모든 분야에 익숙한 교회의 교사들이었던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 시대의 학자들도 과거 신학자들의 자세를 본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현대 신학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집단성을 벗어나 개별 성향의 신학수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시대의 신학교육을 내면적으로 살펴보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교수의 강의 일변도로 진행되는 신학 교육 방법에서 발생하는 문제로서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각 신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공부에 전념하느냐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다보니 현 상태에서는 자연적으로 학점 취득 위주의 공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신학생들의 영적이며 정신적인 건강상태와 경건성이 제대로 확인되기 어렵다. 결국 각 학과목의 성적이 좋고 높은 점수를 받게 되면 훌륭한 학생인 것처럼 인식되어 버린다.

그런 학생들 가운데 학술연구를 위한 상위 단계의 학문 연구를 하여 학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대한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특정 분야의 지식을 갖추어 자신의 신학적 논리를 주장하며 학문 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신학교와 신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육사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개별적인 능력향상을 꾀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엮어져야 한다. 따라서 학과 공부가 중요하지만 이타적인 희생정신에 연관된 건전한 사상이 더욱 중요하다. 원리적인 측면에서 보아 육사생도들은 개별적으로 유능한 인물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국가의 부름과 자기희생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즉 개별성 보다는 전체를 위한 집단성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신학교와 신학생들은 육사와 육사생도들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집단성과 타인을 위한 희생정신을 키워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인위적 집단세력을 형성하는 것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신학교에 속한 교수와 학생을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은,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지상교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신앙자세와 더불어 교회를 위한 신학적 역량을 확립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심각한 문제점은 신학교가 목회자를 세움에 있어서 교회를 무시하는 과정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학교육에 연관된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특히 목사 임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 시대 대다수 교인들은 신학교의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하는 것이, 마치 목사가 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이는 결정적인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신학교는 그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듯이 홍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인 목사의 자격을 허용하는 주체는 신학교가 아니라 교회와 지역 노회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즉 목사를 임직하여 세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의사와 판단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교회로부터 합당한 부르심이 있는 성도여야만 비로소 지역 노회를 통해 목사로 세워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경우에 따라서는 신학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교회와 지역노회가 특정한 형제를 목사 직분자로 세우고자 원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 물론 우리 시대 한국 교회처럼 신학교와 교회 질서가 극도로 혼탁해진 시대에는 결코 권장할만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흩어져 존재하는 건전한 교단과 교회들 가운데는 신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목사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는 신학교보다 교회가 본질적 권위를 지닌 중요한 기관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현대에도 건전한 교회들 가운데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네덜란드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Vrijgemaakt) 헌법(교회질서, 1982년) 제8조에는 ‘신학 훈련 없는 말씀 사역자 허락’에 관한 조항이 있다. 거기에는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의 경우 만약 경건, 겸손, 훌륭한 지력, 분별력, 대중 연설에서 특별한 은사를 가졌다는 확신이 없으면 사역에 허락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신학교의 일반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기본 요건을 갖추었다고 판단될 경우 교회에 의해 목사로 세워질 수 있음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미국의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헌법(교회질서, 2015년)의 <1. 교회의 직분, B.목사(말씀사역자), 7조, a.항>에서는, “규정된 신학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경건, 겸손, 영적분별,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타고난 은사를 탁월하게 받은 증거가 있는 자는 예외적으로 말씀의 사역자로 허락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결코 목사 안수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도리어 목사를 안수하는 교회에 허락된 진정한 권위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

이에 반해 현대 한국 교회에서는 목사를 임직하면서 교회 자체의 권위가 거의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의 청빙과 허락이 없는 상태에서 신학교의 일정 과정을 수료한 것만으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교회의 세속화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목사 임직에 있어서 교회의 권위가 허물어진 상황에서 그 기본적인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해결해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넷째, 지향하는 바와 배격해야 할 대상

참된 신학의 방향성은 명료해야 한다. 교회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절대성과 역사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로 중요하다. 현대교회가 허물어져가는 근저에는 성경의 권위가 약화되거나 무시된 데 있다.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본질을 저버린 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난도질 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적인 검증이 가능하지 않는 성경의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속주의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이 세상에서 필요한 교훈으로 바꾸어 버리고 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영원한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목적을 위해 모든 말씀을 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교회에 계시된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신구약 성경은 이 땅 위에서 기록되었지만 천상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참되고 영원한 진리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역사적인 내용은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이다. 우리는 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약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여 갈릴리를 거닐며 복음전파 사역을 감당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자 완벽한 하나님이다. 즉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의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육체적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 후의 몸의 부활과 몸의 승천 및 몸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믿음으로 인해 그 사실이 종교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내용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실제에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형태의 모든 기적들을 문자적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현대에 들어와, 교회에 속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그런 자들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창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문학의 한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지으신 사실과 에덴동산과 그 중앙에 심겨져 있던 선악과나무의 실제적 존재를 부인한다.

그 외에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허다한 기적들을 믿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에녹과 엘리야의 몸의 승천을 단순한 상징으로 해석한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후 이스라엘 민족이 그 중간을 걸어서 건넜던 사실과, 그들이 시내광야에서 유리하던 사십년 동안 날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아간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에는 전체적으로 다양한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그것은 특정한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신화나 문학적 상징이 아닐뿐더러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제한된 존재이자 죄에 빠져 타락의 늪에 빠진 인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오만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역사적으로 공인된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들을 신앙의 표준문서로 받아들인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강림과 사도교회 시대를 거쳐 보편교회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줄곧 자신의 교회를 지켜 오신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사탄에 속한 나쁜 인간들이 아무리 주의 몸된 교회를 훼손하고 더럽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위기의 상황을 방치하지 않으셨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교회의 올바른 상속을 위해 도움을 주셨다.

그리하여 참된 성도들은 복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악한 세력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들에게 온갖 핍박을 가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통해 특별한 은혜의 선물들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것들은 역사적 교회들 가운데 허락된 정통성 있는 여러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문헌들은 평온한 시대가 아니라 도리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심한 박해와 더불어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그것은 참된 교회의 보전과 상속을 위한 각 시대 교회들의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들에 담긴 모든 내용을 성경과 가장 잘 조화되는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을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해석하지는 않는다. 시대에 따른 건전한 비판정신을 가지고 그 내용들을 살피되, 성경의 기록에 직접 연관된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시도할 수 없다.

역사적인 문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고대 정통교회 시대에 작성된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칼케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와 그 후에 작성된 문서들로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레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 등이 있다. 우리 시대 교회가 이 모든 문서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현대도 과거의 교회적 교훈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참된 신학은 경계와 배격의 대상이 되는 다양한 현실적 문제들을 분별력 있게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지상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신학교는 각 시대 교회와 자신이 처한 세상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타락한 세상은 끊임없이 교회에 속한 어린 성도들에게 미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따라서 참된 신학은 그것들을 분별하고 가려내어 경계함으로써 교회를 지켜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모든 문제들은 일반 세상의 영역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기독교 내부에서 더욱 극성스럽게 기승을 부리게 된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기독교의 이름을 앞세워 미혹하는 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경계하고 배격해야 할 내용들을 신경을 써서 올바르게 파악하고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신학교는 그에 대한 경계의 끈을 잠시도 놓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통해 지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악한 것들에 의해 미혹되거나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혼탁한 사조들로 가득한 현대 기독교가 처한 형편들을 직시해야 한다. 현대 신학은 자유주의, 신비주의, 은사주의, 세속주의, 기복주의,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지상 교회를 위협하는 그와 같은 위태로운 사상들을 강력하게 경계하며 배격해야 한다. 기독교 주변에서 다양한 종교적인 모습을 띠고 기승을 부리는 불건전한 사조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기독교 내부의 어리석은 자들은 그와 같은 풍조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치한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관대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마치 기독교 정신인양 주장하는 자들마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와 같은 사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특히 신학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는, 다음 세대의 자손들이 그에 물들지 않도록 도와주는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그에 침묵하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한 자들을 통해 그것들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단의 신학과 신학교는 세상의 악한 풍조에 대하여 냉철한 해석을 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교회를 일깨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우리는 현대 과학주의에 대한 경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발흥한 각종 진화론은 교회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다. 실제적 근거가 없는 그 사조는 우리 자녀들이 공부하는 세속 학교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르쳐지고 있다. 역사과목에서는 구석기 시대와 원시인에 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으며, 생물과목에서는 미생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과정을 거쳐 점차 인간으로 진화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지구과학이나 우주에 연관된 과목에서는 빅뱅이론이나 태양으로부터 지구와 달이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더욱 위험한 사조는 소위 유신진화론이다. 이는 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했지만 진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는 주장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학설이다.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은 창세기 앞부분에 기록된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는 말씀이 창조기간인 엿새 동안 되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자들은 그 기록된 말씀을 철저히 무시한다. 물론 그 구체적인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과거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유신진화론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첫 사람 아담의 존재와 에덴동산에 살던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에 빠진 사실이 단순한 상징으로 간주되어 그 본질적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첫 번째 아담이 저지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의미를 없애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유신진화론에 연관된 사상은, 외관상 성경을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정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반진화론 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 가운데 일반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자는 아무도 없겠지만 유신진화론에 미혹될 자들이 생겨날 우려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현대 기술문명의 역기능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초초첨단 과학시대라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는 쇳덩어리인 비행기가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컴퓨터와 스마트 폰은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엮는 역할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며 경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술의 발달은 각종 질병 치료와 더불어 인간들의 수명을 실제 수명보다 엄청나게 늘어나게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다수 어리석은 인간들은 문명의 발달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상당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일반은총이라 여기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들에게 일시적인 편의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외면하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렇게 단정 짓기 어렵다. 즉 모든 기술문명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일반적인 은총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들이 역사를 통해 누적된 경험과 기술을 동원하여 세상을 엄청나게 변화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기능은 심각하다. 우리 시대 의술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남녀의 성을 임의로 뒤바꾸어 버리는 일을 보통으로 행하고 있다. 나아가 체세포를 통한 동물의 생명체 양산은 인위적 인간 양산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멀지 않은 장래 과학기술로 말미암은 기계 인간의 출현 가능성을 내다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모든 양상들은 인간들의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을 동시에 파괴하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기술문명 발달이 긍정적이고 순기능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고 역기능적인 측면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은 각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질 것이 아니라 신학교와 교회에 맡겨진 공적인 직무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우리 시대를 허물고 있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폐해이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인간성 자체를 파괴할 만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소위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거의 모든 나라들은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하면 도리어 악한 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당하거나 법적인 책임을 져야할 경우마저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는 법적으로 이미 허용된 상태이다. 즉 동성애를 한다고 해서 법적인 제재를 가하거나 범죄자로 간주하여 체포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시대 역시 동성애가 노골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는 오래전 고대로부터 있어왔던 인간의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동성결혼은 우리 시대에 발생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들의 신종 범죄행위이다. 한 세기가 바뀌는 중에 있던 지난 2000년 말, 네덜란드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난 후 불과 십 수 년을 넘기지 못해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거의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결국 동물과의 더러운 수간행위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미 서구의 일부 국가들에서는 동물과의 성적인 교접이 허용되고 있다. 이는 앞으로 이보다 훨씬 더한 일들이 발생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어쩌면 장차 인간들이 기계 인간과 소위 결혼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될 날이 이를지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생소한 말이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다음 세대의 자녀들은 그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될 것이 뻔하다.

이 모든 것들은 가정의 해체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한 가정을 이루도록 허락하셨지만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어 악한 풍조들이 그 원리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우리의 신학은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지상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을 보호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을 해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한 경계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타락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시대에 와서는 단순히 소극적인 요소들뿐 아니라 공격적인 성격을 띤 악한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경건을 해치는 위태로운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가운데 신경을 써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과 예술, 문화, 스포츠 등에 관련된 분야이다. 우리 가까이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영상매체 또한 심각하다. 영화나 TV등과 같은 매체를 통해 유포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현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가운데는 온갖 악한 사조들이 나돌고 간음을 부추기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또한 정도를 넘은 스포츠에 대해서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와 신학은 프로 운동경기에 대해서 건전한 평가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서서히 해치는 위험한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형태라 할지라도 육체적 경쟁을 지나치게 부추기며 인간과 인간의 몸을 상품화 하는 행위는 바람직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참된 신학은 항상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예의 주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앙이 어린 성도들은 그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그것을 오래 방치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 하고 그것을 가까이 하거나 그에 동화될 우려마저 있다. 신학은 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임무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외부로 관심을 돌릴만한 모든 세속적인 요소들을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와 다른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방치하여 내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교회는 즉시 세속화의 길에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학교육의 올바른 방법

신학교육은 교회에 맡겨진 가장 중요한 직무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올바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신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만으로 올바른 신학수업이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학교와 신학교수와 학생 모두가 이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와 신학교는 항상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참된 교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올바른 교회생활을 영위하는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냉철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현대의 신학 교수들 가운데 성실한 교회생활을 하는 자들이 그리 흔하지 않은 실정이다. 모든 성도는 예외 없이 교회에 속해 있으며 당연히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신학교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당회의 지도 아래 있다. 당회의 지도를 받지 않아도 좋은 교인은 아무도 없다. 신학교의 교장이나 학장, 총장이라 할지라도 당회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건전한 교단과 교회가 신학교와 교육을 위한 실제적 주체가 된다는 사실에 연관되어 있다. 즉 교단과 교회를 떠난 신학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신학교의 교수는 교단의 교사인 동시에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과거 잘못된 교권주의적 행태로 말미암아 신학자들과 신학이 진리를 제대로 외치지 못하던 때가 있었으며, 우리 시대도 그와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단과 교회는 신학교와 상호 건전한 견제를 하는 가운데 신학 교육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가 교회를 통해 다음 세대에 지속적으로 상속되어 가도록 애써야 한다. 성숙한 모든 성도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와 더불어 신학교육은 도제교육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한꺼번에 백여 명 혹은 수백 명의 학생들을 한 강의실에 모아두고 교수의 일방적인 강의를 통해 공부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신학의 학습은 가르치는 교수와 배우는 학생,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학생과 학생 사이에 신앙인격이 상호 교류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식을 배경으로 한 교수의 일방적인 강의가 주를 이루는 수업이라면 진정한 영적인 가치를 공유하기 어렵다.

만일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단순히 지식을 취득하는 것이라면 굳이 신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 시대에는 책을 통한 공부나 방송매체를 통한 학습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한 교사인 목회자 양성과 성도들의 신앙적인 경건한 삶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달라져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수업은 항상 가르치는 교수의 신앙인격이 반영되는 가운데 그 지식이 학생들에게 올바르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즉 신앙의 선배인 여러 교수들의 전체적인 지도와 함께 학생들이 머리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되 그에 그치지 않고 보편교회의 신앙정신과 더불어 모든 신학지식을 공유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마무리]

이제 결론적으로 정리 해보고자 한다. 우리 신학교는 지상 교회를 위해 적어도 한 세 대 곧 30여년이 지난 후를 내다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보다 더 멀리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우선 보기에 얼마나 그럴듯한가에 대하여 민감하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 지나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현재의 형편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성경에 계시된 진리와 올바른 신학을 다음 세대를 위해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앙자세가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미래의 교회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현대 신학의 동향을 볼 때, 앞으로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 이 땅에 참된 신학을 지켜가는 신학교를 보기 어렵게 될지 모른다. 수십 년이 지나면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들지 않은 신학교가 과연 얼마나 남게 될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신학적으로 괜찮은 신학교와 신학교수로 알려진 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유신 진화론을 수용하고 동성애에 대하여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입술로는 보수주의와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고등 비평하는 불건전한 신학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일부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아가 신학자들 가운데는 은사주의를 용납하거나 그 사상을 수용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정통 신학을 멀리한다면 학생들은 잘못된 사조에 동화되어 그에 따라가기 마련이다.

우리 신학교는 이제 막 시작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신학교들 가운데 하나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인본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세속적 사조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힘쓸 것이다. 그 대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교회 가운데 그대로 드러내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부패해 갈 것이 틀림없다.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교묘하게 타락한 양상들이 나타나 극성을 부리며 언약의 자손들을 괴롭힐 것이 분명하다. 우리 다음 세대는 그 모든 환경과 분연히 맞서 싸우며 신앙의 순결을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신학교는 이것을 우리에게 맡겨진 과업으로 알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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