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에게 있는 특징 하나는 ‘나의 복음’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개인의 복음이지만, 예루살렘 사도의 복음과 다르지 않았다(갈 2장). 그래서 사울은 그리스도께 계시를 받은 자로 그리고 사도로 인정받았다. 사울은 그리스도께 계시를 받았고,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화합했다(갈 2:2). 그것은 한 복음은 한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원리이다.

고경태 박사

예루살렘 사도들은 예수께 직접 부름을 받았다. 맛디아는 부활 후에 사도와 유사한 조건의 제자들 중에서 선출되어, 제비로 뽑힌 사도이다. 그럼에도 맛디아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는다. 그 12사도, 120문도 위에 오순절 성령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 교회의 박해자 사울이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의 직분이 있다는 것은, 사울 당사자에게나 교회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와 사도 게바(베드로), 요한이 인증했다. 그리고 이방인 지역으로 파송했다(갈 2:9).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 로마 교회 등의 이방인 지역에서 사역했고, 사도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서 사도 바울 뒤를 이어서 사역했다. 야고보 사도를 제외한 모든 사도는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사도는 보편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위자였다. 교회 세움은 “예수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여, 주의 규례를 준수하는 집단이다. 사도행전에서 주를 믿음은 승천하신 주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고백했다. 120명은 기도하면서 성령을 받았지만, 그 뒤로는 복음 선포 뒤에 성령을 받았다. 복음 선포 없이 성령 오심이 없다. 사도는 복음 선포 없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이다. 참고 우리 사회에 박사가 있는데, 최초 박사는 박사가 아닌 사람이 박사를 수여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적극적인 사역으로 로마 전역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미 로마에 교회가 세워져 바울은 로마 교회가 바른 교리에 세워지도록 로마서를 보냈다(A.D 55년 혹은 56). 그리고 항소한 죄수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갔다. 네로 시절 A.D 64년 로마의 대화재 이후에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졌다. 사도 요한은 A.D 100년 경 에베소에서 사역한 뒤에 소천되었다. 사도 요한은 순교가 아니라고 하지만, 사도 요한은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을 본 유일한 사도이다.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사역자가 요한이다.

그리고 사도 시대 종결 후에 로마 사회에서 복음은 확산되었다. 그 경로는 누구도 파악하지 못한다. 다만 A.D 313년이 되었을 때에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그리스도인이었고, 콘스탄티누스가 종교관용령(Edict of Milan)을 포고해도 어떤 부작용이 없을 정도로 기독교가 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A.D 313년 이전 교회에서 “예수 믿음”을 진행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신학자는 없다. 그것은 A.D 325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예수 믿음의 수준”을 놓고 논쟁한 것이 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고대 교회에서 신학 기준은 “예수 믿음”이었다. 그리고 정통 신앙은 “예수를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믿음”을 고백했다. 필자는 이 정통 신앙을 사도 베드로께서 고백한 “당신은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라는 고백과 동일하다고 평가한다. 정통 신앙이 확립되었지만, 정통 신앙을 거부한 이단들도 자기 이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는 다시 분열의 원인을 갖기도 했다.

A.D 476년 서로마가 최종 멸망했고, 역사의 중심은 동로마(비잔틴) 제국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끊임없이 교회의 중심으로 로마를 주장했다. 결국 A.D 1054년에 동,서 교회가 분열했다. 서방 교회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 구도를 편재했다. 서구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1,000년을 유지했다. 동방 교회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교회가 몰락했다. A.D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동방 교회의 중심이 사라졌다.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이슬람 외 지역에서 존재했다. 교회는 자연스럽게 서방 교회가 주도하게 되었다. 서방 교회는 교회를 계시 주체로 삼았다. 무오한 교회의 칙령으로 라틴어를 세웠다. 그런데 그 중심이었던 교회에 대한 도전이, 헬라어와 히브리어 등 원어 강독에서 무너졌다(ad fontes). 엄격한 개혁가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성경을 기준으로 세웠다. 16세기 유럽에서 가치 판단 기준을 교회, 이성, 성경으로 하는 집단으로 분화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 교회가 유럽에 만개한 이성주의가 성경 기준을 검증하는 것에 동참했다. 결국 성경비평학이 교회를 점령했고, 비평학에 근거한 성경 이해로 신학을 재구성하기까지 이르렀다. 이제 더 이상 성경을 기준으로 신학하는 것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성경제일주의로 성경을 해석하며 이단 교설을 주장하는 무리들에게 그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 현대주의, 이단 세력이 성경제일주의로 교회를 무참하게 공격했고, 그 공격을 교회가 견디지 못했다. 성경에 교리가 필요함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본래 16세기에 성경으로 세운 것은 성경의 가치가 아니라, 1세기 복음과 동일한 고대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이성주의에서 그 가치를 부정하고 이성으로 산출한 새 가치를 이루려 시도한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세운 기독교 가치는 “사랑”이다. 고대 교회의 가치는 “예수 믿음”이다. 교회는 예수께서 세우시고, 교회는 예수를 믿고 섬기는 집단이다. 그런데 근대에 교회는 사랑과 섬김 실천 공동체로 의식되고 있다. 그 신학 기준이 이성주의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시대에 신학의 기준은 교회, 이성, 성경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주의인 교황주의는 2,000년을 유지한 무소불위의 집단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지구 상에 2,000년을 유지한 집단은 없다. 이성주의는 무한한 변형으로 신비주의로 맹활약하고 있다. 성경주의는 이단, 급진적 문자해석으로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우리는 신학의 기준을 다시 구체적으로 설정할 것으로 제언한다. 성경주의이지만 성경 자체 해석과 함께 고대 교회의 가르침과 연속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 초기 교회에는 성경으로 교회를 이루었지만, 고대 교회처럼 구제와 헌신을 기초한 교회를 이루었다. 성경 자체의 가르침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교리에 대한 충분한 가치 존중과 구제와 자기희생을 갖는 교회의 모습을 제언한다. 독립적인 기준점이 아니라, 두 기준점을 제언하는 것이다. 성경과 (고대)교리를 제언하는 것이고, 종교개혁 신학과 고대 교회신학을 제언하는 것이다. 두 기준점의 내용(1세기 복음-예수 믿음)의 일관성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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