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1)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人文學)이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럴 文 배울 學, 말 그대로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 공부'가 인문학이다. 인간이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 연구하는 언어학,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현상과 그 매커니즘을 보여 주는 사회학, 혹 역사학, 인간이 법을 통해 질서를 잡아가는 법학, 인간의 생각과 현상을 표현하는 문학이나 예술 등, 거울처럼 되돌아볼 수 있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삶을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다양한 시선을 통해 타인의 삶을 포용할 수 있는 여유를 안겨 준다. 또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탐구로 스스로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인문학의 열풍이 부는 이유가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회가 험악해 가는 데서 기인하지는 않을까? 50~60년대보다 학벌도 높아지고, 경제적인 상황도 나아졌는데 중고등학생들의 폭력은 더 잔인해지고 시장에서는 원룸, 혼밥 식당, 혼술 주점, 홀로 여행 패키지들이 인기를 끈다. 이런 사람 냄새가 사라지는 사회현상이 교육현장에서 인문학이 사라진 이유는 아닐까?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지은이), 이병곤, 임정아, 고병헌(옮긴이) | 이매진

희망의 인문학(Riches for the poor)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희망의 인문학』은 빈곤한 사람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치적 인간으로 변모시켜 줄 수 있는 책이다.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 말이 있듯이 국가는 빈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업 훈련, 기술 훈련 등을 강권하여 가난을 탈피하도록 돕는다. 국가는 무료급식을 퍼주거나 노숙자들을 단체 숙박 시설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복지 행정을 펼침으로써 국가의 도리를 한다. 그리고 이 정도 먹여주고 기술도 가르쳐 주는데도 빈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극빈자들을 극도로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 이상 국가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도 무료급식과 같은 복지혜택을 받은 극빈자들은 세상이 자신을 무능력자로 취급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빈곤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왜 난 이렇게 무능하지?' 하는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며 오늘도 술병을 옆에 끼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얼 쇼리스는 극빈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직업 훈련이나 무료급식이 아니라 인문학 교육을 통한 사고방식의 전환이라고 진단한다. 정치적인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정치적인 인간이란 사회적 질서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 끊임없이 공간을 찾아가는 중용(中庸)을 의미한다. 선장이 바다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배에서 중용을 잃어버리면 그 배가 침몰하는 것처럼, 극빈자들은 사회적 질서보다는 개인의 자유에 치우친 행동을 하는 지극히 정치적이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밝견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질 만한 성찰적인 의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정치적인 행동과 '부'와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이 책 속에 사례가 흥미롭다. 그것은 테니스 수업에서 아이들의 행동을 설명한 부분이다.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에서 동일한 테니스 수업을 각각 시행하였는데 부자 동네 아이들이 빈민 지역 아이들보다 훨씬 질서정연하고 규칙에 대한 합의가 빨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 동네에서의 테니스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테니스 수업을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반면 가난한 아이들은 테니스를 치기 위한 차례를 지키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않았고 무력을 쉽게 행사하였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테니스를 치는 시간보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단속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고 아이들에게 충분히 테니스를 즐기실 시간이 부족했다. 테니스 수업에서 빈민 지역 아이들은 정치적이지 않았으며 질서와 자유 사이에 중용(中庸)이 없었다. 현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기력이나 폭력 형태의 반응이 정치적인 삶을 대신하는 것이다.

극빈자들은 질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일까? 가난하기 때문에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질서와 합리적인 합의를 돌출해내는 정치적인 사고방식을 가르친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치적인 규칙보다는 무력(武力)의 법칙에 반응하는 것은 무력이 그들이 아는 것의 전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을 통해서 정치적 규칙과 자유로운 행동 사이에 중용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빈민들은 무력과 직업 훈련 외에 배운 것이 없었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소외계층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무료급식이나 당장 취직하기 위한 기술 훈련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성찰을 통한 자기 존중 의식이라고 얼 쇼리스는 단언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적인 인간이 되어야만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 알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동안 만나는 무수히 많은 모순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임시방편적인 요령이 아니라 자기성찰적 사고에 있다고 저자는 확신한 것이다.

부(富)를 만들어 주는 인문학

얼 쇼리스는 클레멘트 코스의 예비 수강생들에게 강연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들을 록펠러처럼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인문학을 공부하면 여러분은 부(富)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부'라는 것이 경제적인 것일 수도 있겠고, 또는 그 이상의 뭔가를 포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문학적 교양이 충만하여 성찰적 사고가 가능한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던 넉넉한 '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물질적일 필요는 없다. 어떤 난관에 봉착한다고 성찰적 사고를 통해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다면, 인문학이 주는 열매를 충분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단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된다면 이 또한 위험한 발상이다. 공적인 삶으로 뛰어들어 자신만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인문학이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을 통해 존재론적 가치가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 에릭 프롬 '소유냐 존재냐'를 읽는다면 이런 개념을 좀 더 넓고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나를 찾아가는 인문학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상가이다. 얼 쇼리스는 극빈자들에게 직업 훈련이 아니라 철학과 미술, 문학 등의 인문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한 끼 식사가 아쉬운 극빈자들에게 철학과 문학을 권유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각 분야의 권위자들을 설득시키고 수많은 빈민자 들을 직접적으로 적극적인 대화를 나누고 설득하여 클레멘트 코스라는 새로운 개념의 극빈자 교육프로그램을 탄생시킨다. 그 결과 1995년에 이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하여 10년이 훨씬 넘도록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진행했으며 더 나아가 전 세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얼 쇼리스는 진정한 사상가이고 진정한 부자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적응하기 가장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감히 위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저냥 큰 걱정 없이 먹고 살고 가족과 도란도란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오는 건 한숨이고, 먹는 건 나이뿐이니 신경 정신과 의사들만 밀려드는 우울증 환자의 호황을 맞아 입이 찢어진다. 그나마 정신과 상담도 빈자들에게는 꿈도 못 꾸는 사치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결핍 속에서 살아간다. 자원의 결핍, 공간의 결핍, 시간의 결핍, 지혜의 결핍, 언어의 결핍, 사랑의 결핍, 지식의 결핍…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물론 성경은 결핍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찾는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접붙임에서 결핍의 해결을 찾는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가? 결핍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을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피땀 흘려 일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행복한 내일이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가? 속단하지 말자. 잠시 제대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자. 인간관계 운운하며 술자리 쫓아다니는 것을 멈추고 인문학 책을 펼치자. 목숨 걸고 잃은 동전 찾듯이 읽어보자. 중용을 찾아보자.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진리를 찾아보자. 나를 찾아보자. 정치적인 인간이 되어 다시 한 번 긴 호흡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다. 주변에 널브러진 것이 도서관이고 책이다. 얼 쇼리스가 말하는 ‘부’가 그 속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워런 버핏은 15세에 동네 있는 도서관에서 투자와 관련된 책을 모조리 읽어 부를 찾았다. 그래도 자기 생각이 틀림없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지금처럼 살다 죽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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