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장로교단들은 크게 통합측과 기장측, 그리고 합동측과 자생적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는 고신교단과 합신 그리고 대신교단 등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이 외에도 그야말로 무수히 많은 장로교단들이 있는 실정이지만, 큰 틀에서는 합동과 통합의 경우와 같이 분열을 통해 양산된 교단들과,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노선을 따른 기장측, 광복 이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모인 고신교단과 그와는 다른 맥락에서 자생했다고 할 수 있는 합신과 대신교단 등, 변질과 분열, 그리고 자체적인 규합에서 유래한 경우들로 뭉뚱그려 분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합동측과 통합측, 그리고 기장의 경우에는 공히 1901년에 설립한 평양신학교와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로부터 그 기원을 소급하고 있는데(합신도 그렇게 보는 것 같다), 이에 따라 100년 이상의 교단역사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어느 교단이 평양신학교와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계보를 잇는지에 대한 판단이 모호한 실정이다. 특히 평양신학교와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엄격한 의미의 장로교회 신학과 전통을 확고히 했는지에 대해 확신하기 어려우므로 그저 역사적인 계보를 따라서만 각 교단의 역사를 소급하고 있는데, 문제는 일제시대와 광복 후 혼란기로 인해 그 정확한 계통을 추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가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논쟁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는 문제다. 왜냐하면 장로교회는 각 지교회를 완전한 교회로 인정하는 ‘회중주의 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아니며, 무엇보다 노회(Presbytery)와 대회(Synod) 등에 의한 연합체로서의 교회론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07년으로만 소급될 수 없으며, 오히려 조선에 장로교회신학과 정치를 전수한 미국과 호주장로회 등으로 소급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대륙의 프랑스와 화란 등지의 개혁교회들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종교개혁시대를 지나 신약시대 교회와 구약시대의 교회를 거쳐 아담의 타락 이후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는 교회에 이르기까지 소급되어야 한다.

더구나 장로교회의 교회론에 바탕을 두고 생각을 해보면, 그러한 이 땅의 가시적인 교회들은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서 모아지는 비가시적인 교회에까지 추적될 수 있으니, 한마디로 한국의 장로교단들의 역사는 1901년에 설립한 평양신학교와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로부터 그 기원을 소급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로교회의 교회론과 신학적인 정통의 계승 가운데서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교회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역사성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 비약하자면,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아직 원점(origin)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어느 교단이 정확한 장로교회의 교회론과 신학적인 정통을 계승하는 체계를 수립하느냐 하는 각축 가운데 아직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가마산교회 장대선 목사

사실 한국의 장로교단들과 교회들의 현실은,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정통성에서 오히려 퇴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회들이 사실상 장로교회가 아니라 분리주의자들이나 독립교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회중주의교회’들이다. 특별히 통합측의 〇성교회 사태와 합동측의 〇〇의 교회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장로교회정치와 재판의 효력이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대형교회인 지교회에 의해 노회와 교단 전체가 휘둘려버리는 현실은, 그야말로 이리저리 흔드는 손길에 맥없이 요동하는 죽은 시신과 다름이 없이 되어버린 장로교회정치와 장로교회로서의 정통성의 사멸을 생생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미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그런 장로교회들의 역사와 혼란을 미리 예견하듯이,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 1946)을 통해 회중주의인 ‘독립교회 정치’를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교회의 다른 어떠한 형태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직 모든 규례에 참예하기 위하여 한 장소에서 모이는 다일 회중만을 인정”하는 독립교회 정치와 달리, “지상에 그리스도의 한 가시적인 보편교회가 있음을 인정하고 모든 개 교회들과 단일 회중을 단지 그 보편교회에 속한 것으로 보는” 장로교회 정치만이 신적 권위를 지닌 교회정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교회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 회중주의의 독립교회 정치에서 교회정치를 하는 자들은 “신자들의 공동체”(coetus fidelium)이지만, 장로교회 정치에서 교회정치를 하는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의 직원들”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로교회 정치에 있어서 한 가지의 유혹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독교회 정치(Episcopalism)의 폐단이다. 즉 장로교회 정치에서 교회정치를 하는 자는 항존직원들(ordinary and perpetual Officers)인데,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의 직원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은 감독자가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 쉬운 것이다. 단언컨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서 절대적이거나 최종적인 권세를 휘두르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목사(혹은 박사)이든 장로(치리장로)이든 집사이든 간에 바로 그 자가 적그리스도(Antichrist)다! 그런 이유로 장로교회에서는 항상 그 권위(Jus divinum)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회(치리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장로교회들의 현실은 대부분, 무수히 많은 감독들과 그 감독들 위에 있는 주교들이 있는 형국이다. 심지어 장로교회의 총회장이 마치 교황인 냥 권세를 갖는 경우까지도 발생하고 있으니, 그런 장로회(Presbytery)는 “오직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의 직원들”로 된 회(치리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Synagogues of Satan)일 뿐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하물며 그런 장로회가 “신자들의 공동체”에 의한 교회정치를 일삼는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 혹 우두머리 밑에 모인 군중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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