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한국사회, 을사(乙死)조약 = 갑생(甲生)조약

일전에 대한항공 일가의 막말 파장과 폭력이 사회의 고질적인 병증을 까발렸다. 항간에 물의를 빚은 소위 가진 자들의 개념 없는 기행(奇行)은 성실하게 땀 흘려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갑의 횡포와 을의 고통에 관해 그야말로 갑론을박이 하루가 멀다 하고 줄을 잇는다. 날강도 일제의 을사보호조약을 떠올리는 을사(乙死)조약이 다른 쪽에게는 갑생(甲生)조약인 셈이니 기가 막힌다. 유력한 갑과 무력한 을의 불평등한 관계가 어디 사업뿐이겠는가? 노사 간의 불편한 관계는 파업과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약도 언제나 강대국 위주로 유리하게 체결된다. 한미동맹도, 조중동맹도 갑을관계다. 현 시점에서 남북관계는 갑을관계다. 으름장을 놓는 갑북과 울며 겨자를 먹는 을남의 처지다.

기업화 된 한국교회와 대형교회 갑돌이

교회 간에도 갑을 관계가 존재한다. 목회자들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고 결혼해서 잘 살았다. 갑돌이와 을순이가 살았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의 재벌(chaebol)이란 말이 새로운 단어로 영어사전에 오르지 않았던가! 재벌은 갑돌이 중의 갑돌이다. 이단의 교주도 갑돌이다. 교주가 죽거나 은퇴하면 자식이나 측근이 종교의 너울을 벗어버린 채 크고 작은 재벌로 나타난다. 대형 교회도 갑돌이 중의 갑돌이다. 그래서 비리비리한 을돌이가 아니라 건강한 을돌이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을을 괴롭히는 갑은 원천적으로 뿌리 뽑아야 한다. 갑의 기가 꺾여야 을의 기가 산다. 을이 살아야 나라의 등뼈가 곧추 세워진다.

미국 상원의 채플린(1983~94)으로 14년 섬겼던 핼버슨(R.C. Halverson) 목사의 해학적 품평은 매우 적절하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으로 출발한 교회는 헬라로 건너가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서는 제도가 되었으며 유럽에선 문화가 되었다가 마침내 미국에 와서 기업이 되었다.” 미국 교회의 기업적 운영이 기독교의 교세 확장에 기여한 공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과가 너무 크다. 거의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이 한국에 뿌리내린 지 오래지 않아 일부 교회는 이미 재벌이 되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크고 강해서 나쁠 것은 없다. 작고 약한 교회들을 돕고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강력히 수행한다면 다다익선(多多益善)이요 강강익선(强强翼善)이며 대대익선(大大翼善)에 대대익선(代代翼善)이다.

선교와 전도로 포장된 교회의 약육강식

동물계에는 약육강식이 뚜렷하다. 역사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어찌 다루었는지를 명료하게 가르친다. 동물계에선 먹이 사슬에 의해 죽고 죽이는 살벌함이 끝없이 자행되지만 적어도 만물을 지탱시키는 순기능도 한다. 어쨌거나 동물 세계에서는 약자의 종도 보존된다. 만물의 영장이라 일컬어지는 인간은 아예 씨를 말려버린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야수보다 더 지독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손실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이 가루가 될 때까지 짓이긴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형제도 가족도 모두 척살 대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궁중 잔혹사는 다름 아닌 권력 다툼으로 인한 왕족들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제노사이드(genocide)는 인간의 학살 본능이 짐승보다 더 지독함을 말해준다. 한 사람이 이념과 사상, 나아가 신앙의 이름으로 무장되면 살인병기로 둔갑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사상보다 무서운 것은 광신의 괴력이다. 지령만 하달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행동한다.

교회의 약육강식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비합법적으로 흡수 통합한다. 공격적 인수 합병은 단지 기업 간의 현상만이 아니다. 강한 교회의 흡인력은 블랙홀을 연상시킨다. 주변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진지한 협의를 거친 것도 아니고 주님의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교회를 확장시키기 위한 목표가 최고선이 되어버린다. 자람의 법칙을 내세우며 선교와 전도의 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정이라며 밀어 붙인다. 아전인수 격인 성경 적용이다.

군벌 보다 못한 목회자 세계

힘 있는 갑돌이들이 모인 곳은 영적으로 왠지 갑갑하다. 영적으로 군벌(tycoon)들이 모인 곳이어서 평화로운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치열하다. 교회의 담임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힘겨루기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전투 행위다. 내가 살기 위해선 어제의 벗도 오늘만큼은 죽여야 한다. 일단 갑돌이가 되어야만 한다. 가장 가까운 동기가 가장 치열한 라이벌이 되고 라이벌을 넘어 적이 되며 적중에서도 난적, 주적이 된다. 동역은 허울 좋은 구호일 뿐 이리와 이리, 전갈과 전갈의 관계를 뛰어넘는다.

친구의 실수와 실패가 다행스럽게 여겨지고 벗의 상승 무드가 불편하게 생각된다. 실로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두 날 가진 칼의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강함과 승리나 영예에 대한 잘못된 신념 때문에 정신이 비뚤어지고 영혼마저 뒤틀려졌다. 재벌과 군벌이 갑으로 머물러 있는 한 이 땅에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을들이 신음한다. 세상에는 을만이 아니라 병과 정도 존재한다. 갑은 을에게, 을은 병(丙)에게, 병은 정(丁)에게 갑질을 하고, 을질을 하고, 병질을 하는 갑을의 병정놀이란 악순환이 계속된다.

천진함을 잃은 냉혹한 교계(敎界)

폴 투르니에의 <강자와 약자>는 심리적인 통찰의 산물이다. 인간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강자와 약자로 구분된다. 인간에게는 강점과 약점이 있다. 강점이 약점보다 승하면 강자요 약점이 더 많으면 약자다. 신앙 밖에서 강자는 누구도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을 의지한다. 약자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의지한다. 생존 본능이다. 약자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가 있고 강자가 지니는 우월감과 교만이 있다. 인간 본성의 뿌리를 파헤쳐보면 모두가 동일하다.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설 수 밖에 없는 한계와 두려움과 연약함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 앞에 놓였을 때 강자는 강하게, 약자는 약하게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신앙은 약자에게 강하게 반응하는 법을 자신감과 함께, 강자에게 약하게 반응하는 법을 유연함과 함께 가르친다. 어린아이들이 위인전을 읽듯 어른들은 동화를 읽을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는 성숙함의 발판을 미리 닦기 위함이며 어른들은 잃어버린 천진난만함을 되찾기 위함이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는 자강(自强)의 길을 모색해야 바람직하지만 현실의 삶은 냉혹하다. 강자는 군림하고 약자는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비극이다.

강자는 문제를 만나면 피하지 않고 붙들어 씨름한다. 큰 문제는 잘게 나누어서 여유를 갖고 하나씩 풀어간다. 문제와의 싸움에서 연전연패를 당한 약자는 문제만 보면 일단 몸을 숨긴다. 그러다보면 작은 문제들이 빼곡히 쌓여 큰 문제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야곱은 강자였다. 그는 이길 수 없는 상대의 도전을 미루지 않고 맞장을 떴다. 중상을 입었지만 승자가 되었다. 승리를 위해 바친 대가는 값비쌌으나 야곱은 난제를 푼 해결의 기쁨을 맛보았다. 다윗도 문제에 고개 숙이지 않고 저돌적으로 싸운 용사였다. 곰과 사자도 그의 적수가 아니었고 최강의 포스를 지녔던 골리앗도 그의 밥이 되고 말았다.

참혹한 세상에 맞서 군사(軍士)를 넘어 용사(勇士)로

강자는 은원에 매이지 않으나 약자는 은원에 확실하다. 강자는 운명을 돌파하나 약자는 운명에 자신을 순응시킨다. 약자는 길들고 안전한 삶을 선호해도 강자는 야생거위처럼 모험 깃든 길을 떠난다. 정처 없이, 대책 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은 강자였다. 85세의 고령에도 가장 험한 산성의 선봉을 자처했던 갈렙은 강자였다. 자신의 약점을 보강하고 강점을 키우면 강자의 길은 멀지 않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강자는 없다. 신앙 안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강자와 약자를 가른다.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 크리스천은 군사를 넘어 용사로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되기를 바랐다. 이 시대는 군사를 넘어 용사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처한 영적 전쟁의 현실이 참혹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전보다 더 강력히 역사하고 우리의 영성은 옛 성인들에 비해 수준이 낮다. 하나님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약화되었다.

“용사되기”(BMW, Becoming Mighty Warrior)는 우리의 삶과 사역 표어로 삼기에 좋은 표적이다. 용사가 되기 위한 기초적 자세가 셋 있다. 첫째, 학습 자세다. 주기적으로(Cyclically), 지속적으로(Continually), 집중적으로(Concentratively), 협력적으로(Cooperatively), 창의적으로(Creatively)이다. 둘째, 기도 자세다. 신음하며(Groaningly), 간절하게(Earnestly), 끈질기게(Tenaciously), 열렬하게(Passionately), 울부짖어(Weepingly)이다. 셋째, 말씀 자세다. 담대하게(Boldly), 치열하게(Intensely), 진지하게(Seriously), 세밀하게(Elaborately), 정확하게(Accurately)이다. 말씀과 기도가 용사화의 두 도구다. 이를 이루기 위한 훈련에 임할 학습 자세가 제대로 갖추어지기만 하면 용사화의 첫걸음이 시작된다.

세상 모든 강자들을 패퇴(敗退)시키는 어린양 예수

세상에서는 힘을 가진 자가 강자다. 권력이든 재물이든 지식이든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자가 강자다. 권력은 세상을 지배하는 윤리다. 재물로 권력을 살 수 있다면 권력보다 재물이 우위에 있다. 재물이 지식에 따라 부림당하면 지식이 재물보다 강하다. 플라톤은 그래서 철학자가 지배하는 나라를 이상국으로 삼았다. 권력이나 재물로 지배하는 왕은 패자(覇者)다. 지식으로 다스리는 자는 현자(賢者)다. 신앙 세계에는 다른 지배 윤리가 우세하다. 섬김을 미덕으로 삼는다. 섬김으로 다스리는 자가 성인(聖人)이다.

약자는 비교로 열등감에 빠지고 강자는 상대와 견줌으로 승부에 매달리나 진정한 강자는 비교하지 않는다. 양 같은 백일을 살기보다 사자 같은 하루를 살겠다는 마키아벨리의 외침과는 달리 평생 이리의 공격을 받더라도 양이 되어 살기를 바라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이 강자다. 세상의 모든 강자들을 패퇴시키는 이가 곧 어린 양 예수시다. 강자는 자신의 약점인 아킬레스건(腱)을 안다. 동시에 자신의 강점인 아틀라스견(肩)을 안다. 아킬레스는 보완하고 아틀라스로 지구를 떠받친다.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는 영가의 구절이 있다. 주님 예수는 절대 강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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