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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를 논의함에 대해서

삼위일체(Trinity)는 교회 근본교리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다. 교리는 이해하면서 혹은 이해하기 위해서 세운 문장이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12세기 안셀름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제시하면서 스콜라 신학을 주도했다.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믿음 체계를 학문화하는데 공헌했지만, 다양한 이설(異說)을 도입하고 허용하는데 적극적으로 개방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으로 다양한 논의 체계를 확립했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제시를 수용하면서, 많은 사색이 있기 때문에 주의를 제시했다. 칼빈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했으며, 삼위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제시하는데 힘썼다(기독교강요 1권 13장).

많은 사람은 20세기 칼 바르트에 의해서 삼위일체 논의가 활성화되었다고 평가한다. 서철원 박사는 칼 바르트 신학에 “신존재가 없다”고 분석했다. 다른 학자들이 반박하기도 했다. “신이 있음”의 규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통신학에서 신이 있음은 “대상”으로 있음인데, 현대신학에 신의 있음은 “행동, 관계”로 전환했다. 칼 바르트 이후에 삼위일체 논의에 대해서 많은 우려가 있다. 그것은 칼 바르트에 의해서 Trinity와 Triunity God 혹은 Triune God의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번역한 영역자는 바르트의 Trinitas와 Gottes Dreieinigkeit를 Trinity와 Triunity God로 번역했다. 우리는 전자는 “삼위일체”로 후자는 “삼중일신”으로 번역하고 있다. 지금의 신에 대한 논의는 바르트가 제시한 Gottes Dreieinigkeit일 수가 많다. 그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영미 신학자들은 Gottes Dreieinigkeit의 개념을 Trinity와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 같다. 바르트는 두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시켰다. 바르트에 와서 삼위일체 논의가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바르트에게서 삼위일체가 종결되고 Gottes Dreieinigkeit 시대가 시작되었다. 바르트 이후에는 바르트의 신관을 거부한다고 표현하지 않으면, 바르트의 신관에 동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현재 많은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보면서 바르트의 신관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 & Economy Trinity)로 구분하면서 이해를 전개한다. 이 용어를 창안한 신학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사용한 것 같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결국 신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스콜라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삼위일체는 고백하고 찬송할 하나님 존재의 현시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과 존재를 자기 교회와 자녀들에게 현시하심으로 믿음의 확신을 갖도록 하셨다. 그 믿음의 보화를 검토하고 탐구한다면 결코 그 신비에 도달할 수 없을뿐더러, 믿음을 파괴하는 역행이 발생할 것이다.

필자는 정통신조(니케야 신조-3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381년)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교리는 “삼위일체를 결정한 적이 없다”고 제시한다. 가장 중요한 교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이심”이다. 그리고 “성령을 믿음”이다. 이 믿음 문장을 고백하는 것이 삼위일체 믿음이다.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이나 혹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등이라고 주장한다면, 정통신조의 결정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정통신앙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을 유지하며 반복하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를 보수하는 것이다. 장황한 삼위일체 설명에 놀라지 말자.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믿음의 대상으로 선언하기 때문에 발생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교회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른 믿음의 대상으로 확립한 것이다. 예수는 1세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1세기에 등장한 참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와 믿음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정통신앙은 예수를 참되고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두 문장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일실체(homoousion)였다. 이것도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교회 믿음의 대상에게 돌격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러한 돌격, 예수를 “둘째 믿음 대상”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예수를 자기 목적으로 삼는 일까지 발생했다. 현재에는 성령까지 자기 목적으로 부리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을 참람하게 하는 일은 자연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 전당인 교회에서 발생한다. 나를 구원하시고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에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삼위일체를 만날 때, “오직 예수, 참되고 유일하신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고백하자. 삼위일체에서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unitas in trinitate, trinitats in unitate)로 제시한다면 바르트의 논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에서 우리는 “믿을 주는 오직 예수”라고 고백해야 한다.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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