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크기가 사명의 질을 결정한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신문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저서: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등.

성경은 어떤 책인가? 누구나 다 아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고 싶다. 평범한 주제이면서도 평범하지 않고,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억의 망각속에 깊이 쳐 넣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성경은 어떤 책일까? 아주 분명하게 예수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영생을 얻는 책이라고...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을 제시한다. 세상에는 휼륭한 책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영생으로 인도하는 책은 없다. 이것이 성경과 인간의 산물로 지어낸 작품과의 차이이다.

우리가 왜 성경을 읽고, 쓰고, 듣고, 연구를 하는가? 영생의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의 정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정신과 가치를 경험하면 그 속에서 무한한 영적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그 에너지는 삶을 회복시키고 치유시키고 바르게 인도하는 놀라운 힘을 제공한다.

 

요한복음 5장

 

영생을 얻는 길은 아주 간단하다. 누구에게는 열려져 있는 문이다.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보편적인 문이기에 사람들은 관심과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영생의 길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제시한 독특한 생명의 길이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생명걸고 선포한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성전미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 잡혀갔다. 예수님이 잡혀서 온갖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자 무서워 벌벌 떨며 고향으로 숨었든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에는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언어가 살아났다. 그들의 행동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당하게 생명을 던지고 예수님을 증거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당당한 외침을 읽을 때마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살아나는 듯하다. 이들의 놀라운 고백과 외침이 늘 그립다. 이것이 예수의 피로 연결된 생명이 있는 공동체의 보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들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리라”(행4:10-12).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이다. 그런데 아이러니(irony,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하게도 유대인들은 지독하게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5장은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다. 38년 동안 걷지 못하는 병자를 일으켜 세웠으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찬하고 함께 기쁨과 감사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한다. 일부의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주님이 노동을 했다. 병자를 살리는 것을 노동으로 보았다. 예수는 유대 율법을 어긴 것이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적용한 사례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율법을 해석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해석을 잘못하면 형식만 남고 본질은 사라지게된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신성을 모독했다고 보았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한다. 하나님과 나는 동등하다고 말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다. 나를 공경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고, 자신을 아들로 이야기 했다. 아들에게 모든 심판의 권세를 주었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신성을 모독했다고 여기고 그를 죽이려 모의했다.

 

요한복음 5장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서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이다. 성경을 연구했으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했던 말씀은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그토록 갈망하며 기다렸던 그 메시야가 왔지만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성경에 관해서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한다. 성경을 좋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분들이 혹시 있지 않을까? 이런 염려를 할 때가 많다. 이런 분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분들일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다. 성경을 볼때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만나면 천국을 바라보게 된다. 기쁨이 충만해진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40). 성경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책이다. 그런데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고 외우고 소중한 책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 내부를 살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참담한 결과지가 나올것이라 본다. 교회를 다니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교회를 다니지만, 영생을 그리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영생보다, 마음에 평안함과 물질적인 보상만 받으면 된다는 사고가 짙게 깔려있다.

 

성경의 목적이 무엇인가?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가? 영생의 선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얻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천국의 영생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구절마다 만나야 한다. 그 기쁨과 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님은 인간들의 마음을 아셨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셨다.

 

  •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0).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영광받기를 포기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 고백을 하지만 마음깊은 곳에는 나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 각자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검검 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느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앙생활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은 반드시 바른 헌신과 참된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사랑의 깊이가 다르다. 고백의 차원이 다르다. 순종의 차원이 다르다. 헌신의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내 삶의 전부를 그분의 영향력 아래 두고 살아간다.그러면 신앙생활이 아주 편하고 즐겁다.

 

예수님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것이 더 쉬운가? 예수님의 영향력 바깥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쉬운가?

과거를 돌아볼 때에 느끼는 것이 있다. 나도 내 맘대로 살아본 적이 있다. 그런데 참으로 힘들었다. 늘 고민이 많았다. 기쁨도 없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었다. 그러나 주님의 영향력 아래 살았더니, 마음이 편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늘 비전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도록 도우셨다. 한 마디로 염려는 사라지고 늘 부유한 마음과 행복이 선물로 찾아왔다.

 

  • 진짜 하나님 사랑하는가?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영향력 아래 사는 삶을 좋아한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의 영향력 아래 사는 것을 거부하거나 조금만 발을 들여 놓고 있다면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낙심과 절망 가운데 고기잡던 베드로를 심방하셨다. 그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면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사랑하면 자신의 전부를 던질 수 있다. 사랑의 강도의 차이가 헌신과 순종의 갈림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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