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태복음 5-7장은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으로 규정한다. 마태복음 5장은 구약, 십계명(6-10계명)을 제시한다. 칼빈은 십계명을 제유법(提喩法, synecdoche)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제유법은 수사법의 한 가지로 사물의 한 부분으로 사물 전체를 표현하려는 기술이다. 대유법(代喩法, synecdoche)의 범주에 제유법과 환유법(換喩法, metonymy)이 있다. 환유법은 한 속성으로 전체 의미를 표현하려는 기술이다. 현대 해석학에서는 은유법(隱喩法, metaphor)이라고 이해를 증진하고 있다.

‘산’에서 가르치는 예수의 모습은 모세보다 더 나은 선지자를 제시한다(참고 요한 6장). 율법주의는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며, 다른 규범을 만들어 율법을 파괴한 것이다. 산상수훈은 구약의 복 개념(물리적으로 이해에서 영적으로)을 확립한다. 천국에 들어갈 예수 백성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도록 명령한다. 살인, 간음, 맹세, 이웃 사랑으로 십계명을 완전하게 가르쳤다. 레위기에서 여호와는 (내가) 거룩하니 거룩을 명령했고(레 19:2), 예수는 (너의 아버지가) 온전하니 온전하라고 명령한다(마 5:48).

2. 팔복(심령이 가난한 자-천국, 애통하는 자-위로받음, 온유한 자-땅을 기업으로 받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배부름, 긍휼이 여기는 자-긍휼이 여김받음, 마음이 청결한 자-하나님을 봄, 화평케하는 자-하나님의 아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 천국, 3-10절)인데, 최종 결론은 “예수로 말미암아 모욕당하고 박해당하고 모함당할 때 기뻐하는 것”(11-12절)이다. 어떤 해석자는 8개가 아니라 1개의 다면성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11절까지 포함시켜 ‘구복’이라고 하기도 한다. 참고로 11절도 팔복과 같이 μακάριοί로 시작한다. 송다니엘 목사는 팔복을 예수께서 제자들을 고난으로 초대한 것으로 제시했다.

3. 예수는 자기 제자(백성)을 소금과 빛으로 규정했다(마 5:13-16). 소금은 맛을 내는 역할이고,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이다. ‘맛’은 객관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개별적이고 주관적이다. 예수의 백성은 세상에서 생명의 맛을 내야 한다. 필자는 그것을 경우에 합당한 말,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은쟁반에 금사과, 잠 25:11, 약 3:1-12)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 백성은 세상의 빛인데, 이성의 빛이 아니라 생명의 빛이다. 자기의 정성과 생명을 태워 밝히는 생명의 빛이다.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는 이성의 빛으로 세계질서를 잡겠다는 운동이다. 계몽주의 이후에 문명은 급격하게 발전했지만, 인류역사에서 상상하지 않았던 기이한 현상들이 속출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쉬지 않고 나가는데, 이것이 문명의 혜택인지 어둠이 깊어지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18세기에 시작한 이성의 빛이 12세기에 와서는 생명의 빛을 흡입할 정도로 강력한 블랙홀이 되었다. 사람으로는 그렇지만 주께서 주신 생명의 빛은 세상 블랙홀을 뚫고 비추어 생명을 구원한다(Post Tenebras Lux). 참빛, 예수 백성의 착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 착함은 생명 증진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유익을 주는 직업, 생명을 풍성케하는 직업에 참여해야 한다. 예수 백성은 세상에서 맛과 생명(즐거움과 유익)을 공급해야 한다.

4. 예수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마 5:17-20).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마 1:21). 예수께서 백성에게 복을 선언하셨다(마 5:3-12). 박해를 받는 것이 믿음 정진에 쉼이나 지체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상(賞)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마 5:12, 히 10:35).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의인이나 율법교사보다 더 우수한 의와 법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예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혹 “율법의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말라”(19절)는 주님의 말씀으로 구약 조항 준수를 주장한다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작은 것 하나의 한 예는 “고르반”이다(막 7:9-13).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율법이 율법을 폐기하는 현상이다. 율법에 작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이 문제이다. 주께서는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셔서 성취하셨다. 주께서 제정하시고 완성하신 율법 어느 하나라도 소홀하게 제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큰 것을 보내며 작은 것을 잡아내는 거름망인 율법주의가 부당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통되고 있고, 지금은 “변호사”라고 한다.

5. [마 5:21-26] 6계명 살인하지 말라(혀의 죄). 형제를 모욕하는 자는 살인하는 것이다. 형제와 불화를 추구하는 것은 살인이다(참고 엡 5장). 사람을 실재로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인격살인”도 살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6장 주기도문에서 용서와 구함을 기도한다. 살인을 금한다는 명목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의식이 있는데, 국가 존재와 대치되는 주장이다. 창세기 11장에서 죄로 말미암아 민족과 나라가 형성되면서 국가는 사회 필연 구성이 되었고, 그 구성체 보존을 위해서 군대는 필연이다. 기독교라면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성경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6. [마 5:27-32] 7계명 간음하지 말라(눈의 죄). 마태는 남자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음에 대해서만 제시했다. 그러나 현재에는 여자가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시대이기도 하다. 간음 금지는 가정을 유지를 위한 제도이다. 가정이 튼튼하면 사회 질서는 안정적이 될 것이다. 가정을 가부장제도의 근본으로 보는 네오막스즘(계급투쟁), 페미니즘, 인권(개별화)에 의해서 가정 해체가 일반이 되었다. 우리 시대는 가정을 남녀가 이루는 가정에서 한가정, 동성가정 등등 다양한 종류를 제시하고 있다. 가정은 남녀가 한몸을 이루며 자녀를 양육하는 사회 기본 단위로 이해해야 한다. 종교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나 동성가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고결한 인간 의식이 아니라, 타인으로 유지되는 사회에 편승하겠다는 발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7. [마 5:33-37] 8-10계명은 이웃(사회) 관계이다. 마 5:33에서 ‘맹세’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헛맹세’를 하는 신성모독적 행동에 대해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34절). 자기의 생각을 명확하게 말하도록 했다(37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고, 자기 견해만을 명확하게 밝히도록 한 것이다. 간혹 무지와 미숙한 상태에서 판단할 경우에 ‘예와 아니오’를 답하지 않고 미룰 때가 있다. 이 때에 먼저 미성숙한 상태를 인지시키고, ‘예와 아니오’를 답변하면 된다. 모르기 때문에 판단유보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주 예수의 가르침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겸손이 아니라 판단중지(判斷中止, epoché)로 철학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한계에서 최선을 다해서 예와 아니오를 답해야 한다. 자기 예와 아니오에서 오는 부담과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간과 공간의 제한과 한계, 피조된 자로서 한계에 두셨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부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은 이웃 관계의 문제이며, 거룩한 주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다.

8. [마 5:38-42]원상회복(原狀回復, restitution)의 원리. 율법에 있는 눈은 눈으로는 복수법처럼 보인다(출 21:24-25). 고대근동에서 유사한 문장이 있는데 탈리오(lex talionis)라고 규정한다.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혹은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인 탈리오 법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보복을 보장한다. 정의를 가해자에게 정당한 형벌을 부과시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데, 필자는 정의를 화평과 균형을 위한 공평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피해자가 더 가혹한 피해를 받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는 한 공동체 일원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살리고 유지하는 능력에 관련된 부분으로 이해한다. 예수님께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자기 피조물이다. 그리고 법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고, 원상회복이다.

9.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할 자를 미워하고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다(마 5:43).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함께 주시는 것처럼, 예수 백성에게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5:44). 원수를 사랑할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주신 평안과 부요함으로 가능하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초하면 형제도 사랑할 수 없다. 주 예수께서 바다의 폭풍을 잔잔케 하셨듯이, 그의 복음으로 우리 마음에 거친 풍랑을 잔잔케 하신다.

10.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을 들으며 묵상하며 지켜 행동하며 주의 도를 깨닫게 하옵소서. 주의 계명이 우리 양식이니, 살과 뼈가 되어 강건한 주의 사람을 이루소서. 주의 율례를 알며 준행할 수 있도록 지식과 지혜를 주옵소서. 좀 더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여기에 머물고 있는 이 순간이 어둠입니다. 주 하나님께 더 가까지 갈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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