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12 사도, 12 제자, 쉬운 개념은 아니다(12 Apostles & disciples).

‘disciples’를 우리는 쉽게 ‘제자’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간혹 ‘제자도’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12 명의 제자를 예수께서 부르셨다. 12 명의 제자는 사도이다. 주님이 부르셔서 세운 12명의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 12 명에서 한 명의 배반자가 나오고, 대신 부활 승천 후에 한 명(맛디아)이 충원된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사울을 사도로 세우셨다.

제자와 사도의 차이는 사도는 직분으로 한정되지만(extraordinary office), 제자는 제자로서 계승된다. 제자의 제자는 그 제자의 제자이다. 사도 시대에는 사도와 다른 동역자(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에게 직접 계시를 주었지만, 제자 후 제자 시대에는 직접 계시가 종료되고, 사도의 가르침 위에서 완전하게 교회가 세워지고 유지되도록 했다. 그래서 교회를 사도의 가르침 위에 굳건하게 세우도록 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 세움은 28장에서 제자 삼음으로 연결된다. 28장에서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제자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해서 자기 제자를 삼는데, 그 제자는 예수의 명령을 수행해서 삼은 예수의 제자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회가 보존해야 할 이 진리를 단절시켰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은 ‘성경의 제자’로 다시 서서 진리를 계승하고 있다. 사도의 제자에서 성경의 제자가 사도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

목사의 설교가 성경의 제자가 되지 못하게 한다면, 마태복음 7장에서 거짓 선지자(열매로 알리라)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악이라고 규정하셨다. 맹인(소경)의 인도를 받을 자가 있는가? 예루살렘 멸망을 보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망하라는 명령을 거짓 선지자에게 적용해야 한다. 급변하고 위급한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는 거짓 선지자에게 약간의 여지나 동정을 주지 말고 피하라. 제자가 거짓 선생을 걱정하는 것은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거짓 선생은 자신이 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제자가 천국 가는 것을 생명을 걸고 막는다. 거짓 선생의 제자는 즐겁게 지옥에 가든지, 힘들게 지옥에 가든지 해야 한다.

② 예수께서는 12 제자를 (구별하여)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병과 약한 것을 고칠 권능을 주셨다(extraordinary gifts, 1절). 제자는 제자에게 전할 것은 ‘분부한 것’이다(마 28:20). 예수께서 분부한 것은 천국복음을 잃어버린 양에게 전파하는 것이다(마 10:6). 이 전파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야 한다(마 28:20, 행 1:8). 제자는 천국 복음과 축귀와 치유 사역을 하며,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마 10:7-15). 이런 행동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예수 이름이 땅끝까지 충만해야 한다.

③예수께서 자기 제자가 양인데, 이리의 소굴로 보낸다고 하셨다(마 10:16).

이리 소굴에서 양이 생존하는 방법으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명령하셨다(마 10:16). 사람들은 제자를 고발하고 능욕할 것이다(마 10:17-18). 필자는 세상 영화로운 자리에서 예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아들에게 이양하면서, 가장 힘든 십자가를 자기 아들에게 부여한다고 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그들이 그 상황을 세상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오히려 자신이 세상과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아닌가?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처럼, 제자는 세상에서 있을 자리가 없다. 제자는 세상에서 힘든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마 10:23). 주의 제자가 주의 이름으로 힘을 얻고, 주의 복음과 교회를 이루어야 가야 한다.

④ 제자는 선생보다 높을 수 없다(마 10:24).

미래에 발생할 것을 예언하며 경고하는 것으로 들린다. 유럽에서 태동한 교황주의는 사도 베드로의 보좌에 앉은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하지만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졌다. 마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에서 반박한 요지이다. 죽은자의 죄를 사면하는 것이 이 땅의 보좌에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국에서 태동한 신천지는 요한 사도의 계시를 계승한다고 한다. 참 가르침(계시)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일을 서슴지 않으며, 그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를 인정하고 찬양하라(마 10:32-33). 예수를 안다고 하면서 예수를 반역하는 일에 제자들이 동참하는 것은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시 1편). 예수 백성은 예수 이름을 높이며 땅끝까지 전파해야 한다.

⑤제자는 자기의 선생을 기억하면 된다(26절).

세상이 주님을 바알세불이라 했으면, 그의 제자들을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25절). 참 선생이신 예수는 만왕의 왕이시다. 세상 권세는 몸을 죽일 수 있는데, 만왕의 왕의 권세는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다(마 10:28). 그리고 만왕의 왕은 제자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은 사람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면 된다(32-33절).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3계명으로 연결한다. 예수의 이름과 사역(복음)을 일점일획을 더하거나 빼면 안 된다.

⑥예수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시지 않았다(마 10:34).

세상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오셨다. 어둠에 빛을 주신다. 대속할 죄인을 구원하셔서 알곡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하는 가라지는 불구덩이로 분류하신다. ‘검(劍)’은 천국 백성에게는 생명의 검이고, 지옥 백성에게는 죽음의 검이다. 이 구분은 가정에서도 발생하기 때문에 불화가 발생한다. 영과 육의 갈등에서, 영의 사람은 온유와 겸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가정에서 불화는 가장 참기 힘든 어려움이다. 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다면 선생을 따를 수 없다. 가정에 검이 떨어졌을 때에, 사명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복된 삶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은 것과 같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으셨다. 예수는 참 선생이요 참 친구이시다.

⑦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자”라고 하셨다(마 10:40).

요한 1:12에서 “영접하는 자”로 해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마태 사도는 예수께서 “너희를 영접”하는 것으로 가르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곧 사도의 가르침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어서, 삼위일체 신앙을 확립한다. 예수 제자는 성육신 주님처럼 볼품이 없어서 영접하기 어렵다. 사도 바울은 최고의 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예수의 제자가 된 뒤로 사회적으로 볼품이 사라졌다. 바울 스스로 배설물로 여기기도 했다.

영접은 선지자의 이름,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할 수 있는데(마 10:41),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해야 한다(마 10:42).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이 천국에 있을 상으로(41절) 보기 어렵다. 예수께서 선지자와 의인으로 가르침을 계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자로 복음 전파를 명하시기 때문이다. 선지자와 의인은 세상에서 영접할 수 있겠는데, 제자 이름으로 작은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인간으로 불가능하다(42절).

⑧전능하신 하나님, 사도의 가르침을 진리로 수납하게 하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사도에게 주신 가르침을 받아 힘써 죄사함과 영생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주께서 반드시 어렵다고 말씀하셨으니 참아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은혜를 주셔서 도움과 피할 길을 주십시오. 주의 은혜로 인내하며 복음을 정진하여 나의 분깃과 땅끝까지 동역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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