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4장. 오병이어 그러나 제자의 길은 기도와 고백이다

마태복음강해】 14장. 오병이어 그러나 제자의 길은 기도와 고백이다

1. 예수의 사역을 들은 분봉왕 헤롯 안티바스는 세례 요한의 부활로 생각했다(1절). 그 요한의 사역 중 하나는 헤롯의 추행을 지적하는 것이었는데, 헤롯과 헤로디아 그리고 그녀의 딸이 협잡해서 세례 요한을 죽였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고한 사람의 목을 달라는 것이었다. 헤롯이 반한 여인 헤로디아는 소반에 얹혀 있는 요한의 머리를 보고 기뻐했다.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장사한 뒤 예수에게 알렸다(12절). 예수님의 시체는 은밀한 제자(아리마대 요셉)이 장사했다.

2. 예수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떠나 빈들로 갔다(13절). 그 빈들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병자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고쳐주셨고, 저녁이 되어 그 모든 사람을 오병이어로 먹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셨다(19절). 그 숫자가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5,000명이었고(21절), 남은 수량이 12 바구니였다(20절). 오병이어를 가지고 예수께서 감사할 조건과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했다(살전 5:18).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맹목적인 감사가 아니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감사를 범사에 해야 한다. 막막한 상황에서 한 푼으로 어떤 내용으로 감사할까?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은 기적은 모세의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과 같다. 만나를 먹고서도 요단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있듯이, 유대인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을 사람이 많았다.

3. 예수께서 제자들을 무리에서 분리시켜 배로 건너편으로 이동시켰다(22절). 그리고 자신도 무리를 떠나 기도하러 홀로 산으로 가셨다(23절). 제자들이 밤중에 배로 이동하는 동안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동안 제자들을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시고 홀로 산에 올라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셨다(22-23). 기도가 사역에 기본임을 알 수 있다. 사역 전에 기도하는 것과 함께 대중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끌 때에 기도하는 것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던 제자들은 바람이 심하여 심한 고생을 했다(사시, 새벽 3-6시). 예수께서 상황을 아시고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 제자들은 자기 오시는 주님을 보고, 유령으로 알고 무서워했다. 다가오는 예수를 확인한 베드로는 주님께 자신을 오라고 간청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고, 베드로는 냉큼 물로 내려가 물 위에 섰다. 그런데 곧 무서워해서 물에 빠졌다. 물에 빠진 베드로를 주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신다. 그리고 ‘믿음이 적어서 의심한 것’이라고 밝혔다(31절). 그러한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ἀληθῶς θεοῦ υἱὸς εἶ.)”이라고 칭송했다(33절).

4. 게네사렛 땅에서 두루 사역하셨다(마 14:34-36).

5. 전능하신 하나님, 시대를 개혁하는 사역을 순수 복음에 근거해서 진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믿음의 동역자가 사라지고 쓰러져도 복음 전도에 쉼이 없이 전념하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이 귀하게 여기도록 주의 종을 사용하옵소서. 아무리 적은 힘에도 감사함으로 주의 기적을 기대하겠습니다. 주의 일은 주께서 하시나이다. 모든 두려움과 염려를 벗어버리고 주를 믿겠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태복음13장. 천국 비유(譬喩)는 쉽지 않다

1. 비유(譬喩, parabole, parable, 어의(語義). 사물을 나란히 놓는다)는 예수께서 사용한 전유적인 교육 방법이다. 그래서 비유의 목적에 대해서 많은 의견이 있다. 누구도 예수님처럼 비유로 교육하지 못한다. 알레고리(allegory, 우화적)도 아니고 산파술(産婆術, Socratic method)도 아니고, 선문답(禪問答)도 아니다. 예수의 비유는 제자들이 깊게 묵상할 수 있는 도구이고, 무리에게는 넘지 않으려는 벽이다. 그 깊음에서 다양한 의미들이 파생되도록 하는 가르침이다. 성경 해석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예수의 비유라고 볼 수 있다. 비유에 대해서 예레미야스의 제시가 상당히 유력하게 유포되어 있는데, 예레미야스는 비유(특히 씨뿌리는 비유)를 당시 청중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성경은 비유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이 있다고 제시했다(13:12-16). 비유에 대해서 예레미야스와 마태의 견해는 전적으로 배치된다.

2.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마 13:3-23) 좋은 씨와 좋은 땅에 관한 것이다. 3-9절에서는 씨부림에 대한 제시이고, 10-23절까지는 제자들에게 설명한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의 목적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다”라고 하셨다(11-13절). 허락되지 않은 행위를 왜 모든 사람에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복음 선포의 보편성과 신비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하지만,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 안에서 일부에게만 허락되었다. 복음 선포자는 그 허락된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복음은 땅끝까지 모두에게 전해야 한다(마 28장). 예수께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 것을 염려하셨다(15절). 그것은 보고 들어도 알지 못함을 결정한 것이다(14절).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지식이나 감정으로 이루지 않도록 규정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고 지냈지만,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떠났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어떤 고난에서도 보이지 않는 예수를 떠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먹고 마심의 감동과 함께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주 예수를 굳게 믿음을 피력했다(요일 1:1-4). 예수를 따르는 길은 짊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마 11:25-30).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100, 60, 30 배의 결실을 하는 좋은 땅과 같다. 씨앗은 모두 6개가 등장한다. 길 위,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에 100, 60, 30 이다. 3개의 두 유형에 결실이 없거나 결실이 있다. 결실이 없는 3 씨앗은 3 유형에 떨어져서 결실을 맺지 못한다. 결실이 있는 3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도 3 종류로 나뉜다. 마가복음에서는 100배만 제시하고, 누가복음에서 30, 60, 100배로 제시한다. 세 종류의 좋은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라은태 목사는 퀄리티(Quality)와 퀀티티(Quantity)를 제언했다. 1 콴티티에 3 퀄리티가 나온 것이다.

3. [마 13:24-50] 가라지 비유 사이에 있는 겨자씨 누룩 비유 그리고 보물, 진주, 그물. 좋은 땅 좋은씨(곡식)에 나쁜씨(가라지)가 있다. 주인이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렸는데 밤중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종들이 밭에 있는 가라지가 많은 것을 보고 뽑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수 있으니 추수 때까지 두라고 명령했다. 추수 후에 곡식과 가라지를 분리해서, 먼저 가라지는 불사르고 곡식을 곳간으로 넣으라고 했다(30절).

그리고 겨자씨와 누룩을 비유를 말씀하셨다(31-33절). 가라지 비유는 좋은 땅에 있는 나쁜 것이고,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겨자씨 나무에 새들이 깃들이고, 반죽을 누룩이 부풀게 한다(32-33절). 겨자씨는 풀보다 크게 자라야 하고, 반죽은 누룩의 도움으로 부풀어 올라야 한다.

예수께서 비유로만 말씀하셨다(34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 성취를 증거하시기 위함이다(35절). 메시아는 창세부터 감추인 참빛을 보여주셔야 했다(35절, 요 1장, 시 78:2).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비유로 말하는 선지자를 만나면 그가 메시아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창세부터 감추인 것은 창 3:15의 여자의 후손으로 연결해 본다. 여자의 후손은 독생자에게 전유되는 유일한 사건이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여 임마누엘을 성취하실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리를 떠나 집에서 제자들에게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셨다(36절). 가라지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다(37절). 인자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고, 안식일의 주인이고, 좋은 씨를 뿌리는 이이다. 밭(세상)에 좋은 씨(천국의 아들들)와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들)가 있다. 세상 끝의 추수군은 천사들인데(39절),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과 같은 일을 한다(40절). 마지막 날에 인자가 천사를 보내어 불법한 자들을 거두어 풀무불에 던져 넣는다(41-42절). 그 때 의인들이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이다(43절).

4. [마 13:44-50] 보물, 진주, 그물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 값진 진주와 같다. 그리고 천국은 그물에 잡힌 고기와 같다. 세 비유의 특징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다.

감추인 보화는 “감춰진 비밀”이고, 값진 진주는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비밀”이다. 모두 보화를 소유하려는 사람은 자기 전 재산을 팔아야 한다. 전자는 재산을 잃고 밭도 얻고 보화를 얻었지만, 결코 보화 얻음을 말할 수 없다. 후자는 재산을 잃고 진주만 소유하지만 모두에게 말할 수 있다. 천국의 비밀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말할 수 있는 비밀은 말하고, 말하지 못할 비밀은 간직해야 한다. 말하지 않아야 할 비밀을 말하면 비밀은 사라질 것이고, 말해야 할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면 구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물에 잡힌 잡힌 고기 비유(47-50절)는 알곡과 가리지 비유(36-43절)와 유사하다. 두 이야기가 중첩 되는 것 같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서 알곡과 가리지를 구별하고, 이방인에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분리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가라지와 못된 물고기는 불에 던져진다. 마지막 날에 가라지와 못된 고기는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최종 칭의) 마지막 전에 이미 가라지와 못된 고기였다. 마지막 날에는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5. [마 13:51-52] 새포도주는 새것과 옛것을 자유롭게 사용함. 예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효과적이었다(51절).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완성되었다. 그날이 되면 제자들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새것과 옛것(구약과 신약)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한다(52절). Then said he unto them, Therefore every Scribe which is taught unto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unto an householder, which bringeth forth out of his treasure things both new and old.(Geneva1559) ὁ δὲ εἶπεν αὐτοῖς· διὰ τοῦτο πᾶς γραμματεὺς μαθητευθεὶς τῇ βασιλείᾳ τῶν οὐρανῶν ὅμοιός ἐστιν ἀνθρώπῳ οἰκοδεσπότῃ, ὅστις ἐκβάλλει ἐκ τοῦ θησαυροῦ αὐτοῦ καινὰ καὶ παλαιά. μαθητευθεὶς(disciple, instructed, trained, taught)는 1회 사용되었다(참고, biblehub.com). 예수께서 제자들을 “천국을 말하는 서기관”으로 규정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은 오직 알곡(좋은 고기)에게 허락되었고, 가라지(나쁜 고기)에게는 풀무불로 던져진다.

6. [마 13:53-58] 고향에서 배척당하심 예수께서 모든 비유를 마치시고 그곳을 떠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예수를 배척했다(57절). 나사렛 사람의 특징은 나사렛 자신이 자기를 모욕하는 것이다. 사람으로는 결코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7.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신비에 오늘도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를 드리나이다.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 오는 엄위는 오히려 주를 붙들고 간청할 힘이 되나이다. 구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말씀의 도를 믿으며 정진할 뿐입니다. 주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이 강건하게 하옵소서. 영혼의 강건함으로 이 시대를 이기며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주의 복음이 전도자의 입에서 선포되게 하시옵고, 그 결실이 100배 맺히게 하옵소서. 내가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태복음12장. 예수께서 연 새 시대는 ‘주일’이다

1. [마 12:1-8] 안식일 논쟁,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이다. 안식일 규정은 새시대의 선언인데, 사도들은 안식일에서 안식 후 첫날로 옮겼다. 사도의 가르침이 세계 시간을 규정하고 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이동할 때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비판했고, 예수는 다윗의 예를 들어서 변호했다. 안식일에 밀밭으로 가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누가 올무를 놓고 있는가? 예수는 제자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조상 다윗의 오류에 대해서 책망했다(마 12:4).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일을 한다(5절). 다윗이 범한 성전 침범은 용인하면서 사소한 것은 정죄하는 율법주의의 모습이다. 안식일에 모두가 안식한다는 것은 비약이 있고, 안식일에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도 큰 일을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들이다. 큰 것은 보내주고 작은 것을 막는 거름망은 불법이다. 예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호 6:6, 삼상 15:22, 삼상 21: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인자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마 9: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마 12:8). 인자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고 안식일의 주인이다.

2. [마 12:9-21] 안식일 논쟁 2탄. 안식일에 예수께서 손마른자를 고치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공격했는데,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12절). 선(善)이란 무엇일까? 선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고경태). 즉 의(義)를 행하는 것(의로운 행동)이 선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의(義)이시고, 인자의 행동은 선이다.

예수는 손마른자를 고치셨다(13절). 이에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일까 모의하기에 거기를 떠났고(14절), 예수는 다른 곳에서 옮겨 따르는 자들의 병을 고치셨다(15절). 바리새인을 따르는 자들 혹은 머뭇거리는 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분리된 것이다. 예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유대인의 심판”을 이방에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열방을 위해서 유일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데, 거꾸로 그것을 막는 악행을 범했다. 메시아는 그 심판을 다툼없이 소리없이 진행하여, 상한 갈대를 꺾지 않았고 꺼져가는 심지는 끄지 않았다. 그것은 이방이 자기 이름을 바라도록 하는 배려였다(19-21절). 그리스도인은 쟁투에서 할 자세인데, 쟁투에서 상대하는 적을 꺾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지켜보는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서 주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거나 상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 [마 12:22-37] 예수께서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다(마 12:22, 참고 마 9:32-34). 무리들이 “다윗의 자손”인가 하며 웅성거렸다(23절). 웅성거림은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 의심(疑心)하는 모습이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힘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 개념에서 다윗의 자손은 귀신을 쫓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격한 유대인은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라면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자기가 규정한 다윗의 자손”이다. 그들은 절대로 자기보다 큰(자기 개념을 넘어선) 다윗의 자손을 용납할 수 없다.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바알세불과 성령으로 가능함을 제시했다. 바알세불로 쫓아내면 그 집을 강탈하는 것이고(29절), 성령으로 하면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28절). 그래서 성령으로 하는 일을 모독하는 것을 결코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단언하셨다(12:31-32). 성령으로 하는 것은 언제나 비밀스럽다. 그것은 오직 사람의 언어로 전달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지,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33절).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이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는데, 우리는 나무를 판단할 수 없고 열매로 판단할 수 있다. 마 7장에서 열매로 아는 대상은 선지자라고 제시했다. 나무는 좋은데 좋지 않은 열매가 맺혔다고 생각하지 말자. 독사의 자식의 입에서 나온 것은 독(毒)이지 선한 것이 될 수 없다. 독사의 자식이 선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 밖에 없다(35절). 심판날이 있고, 그 날에 심판은 주님이 하시는데(36절), 그 기소권은 자기 입에 있다(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37절).

4. [마 12:38-45]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계시가 충족된 지금에도 표적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1세기 계시자인 예수께서는 표적 구함을 주의시켰다. 믿음은 언제나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물로 가능하다. 믿음은 혈과 육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이성적인 수준이다. 사람은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합리적으로 형상을 만들기 때문에, 영적인 표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불신(不信)으로 조작한다.

바리새인은 자기 인지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표적을 구한 것이다(38절). 하물며 세례 요한도 금식하지 않고 죄인들과 함께하는 주님의 모습에 의심을 품었다. 바리새인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이해는 된다. 그 수준에 있다면 그들에게 배우고 있는 유대인들의 수준은 어떠했을까? 복음서가 묘사하는 1세기 상태와 새관점학파의 제시가 전혀 상반됨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비평주의에서는 성경문서가 편집되었다고 주장하고, 자기신념대로 내러티브를 재편성했다.

예수는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에게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다. 요나는 사흘에 부활하실 것인데, 그 뒤에 요나가 한 일이 중요하다.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했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했다. 이방인이 회개했는데, 유대인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떠한가?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말을 듣기를 사모했는데, 솔로몬보다 더 큰 이(지혜)가 오셨는데 부정하고 있다. 이방인보다 못한 유대인들의 경건 수준이다.

예수는 축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주인에 대해서 제시하셨다(43-45절). 귀신이 나갔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면 더 많은 귀신을 데리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계몽주의가 했다고 생각한다. 계몽주의는 옛무지(맹목과 독단)을 제거함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제거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더 많은 악이 들어와 버렸다. 유럽은 기독교 사회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동성애를 허용하는 대표적인 사회가 되었다. 동성애는 인간 번식을 거부하는 인류자살이다. 최소한 타인의 생존 능력을 의존하는 기생적인 행동이다. 동성애는 생존 기반을 제거하는 탐욕이다. 옴(scabies)은 진드기에 의한 피부병인데, 간지럼을 유발시키고, 간지러주면 너무나 시원하다. 그러나 피부에 염증이 생기며 감염이 확장된다. 공간이 깨끗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배치되었는지가 중요하다.

5. [마 12:46-50] 예수님의 가족. 예수의 행적은 어머니나 동생들이 용납할 수 없었다. 예수의 동생들이 있었다는 것에서 마리아 평생 동정(Perpetua Virgo)에 대한 것이 성경적이지 않음이다. 평생동정은 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년)에 결정했다고 한다. 로마 교회에서 주장하는 마리아에 대한 4대 교리는 하나님의 어머니(데오토코스), 평생 동정, 무염시태, 성모 승천이다.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 결정한 “하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에 관한 교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이다. 예수의 동생들에 대해서 다른 설명을 하기도 하는데, 평생 동정을 맞추려는 억측이다. 평생 동정과 함께 무염시태, 승천 교리까지 있으니 점입가경이다. 33년을 지내신 예수보다 마리아의 무죄성의 깊이가 더 깊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진정한 가족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하셨다(50절). 아버지의 뜻을 보내신 자 그 아들을 믿는 것이다.

6. 전능하신 하나님, 주께서 여신 새로운 시대, 새언약에 살고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영적 지식이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옵시고, 주의 택자를 양육할 수 있도록 지식, 지혜, 능력을 주옵소서. 오직 믿음으로 복음선포로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십자가 은혜로 세워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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