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609년에 발발한 유다 왕 요시야와 애굽 왕 바로느고와 ‘므깃도 전투’는 갈그미스 전쟁(Battle of Carchemish)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가 므깃도 전투를 BC 605년으로 세우는 것은 갈그미스 전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갈그미스 전쟁은 BC 612년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수도 니느웨를 잃고 갈그미스 성읍 중심으로 다시금 세력을 정비했다. 바벨론의 집중 공격에 크게 고전하며 버티고 있었다. 바벨론의 확장을 견제하려는 애굽 바로느고가 갈그미스로 원정길을 떠났다. 이것을 앗수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다 왕 요시야가 애굽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므깃도를 봉쇄했다. 이 전쟁에서 요시야 왕은 전사하며 바로느고가 승리했지만, 앗수르를 도울 애굽 군대의 전력에 큰 손상을 입은 상태로 전장에 도착했다. 바로느고의 군대는 갈그미스까지 가서 바벨론과 전투를 개시했으나 싸움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바로느고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전하여 귀국하는 길에 3 개월 통치하고 있는 17대 왕 여호아하스(어머니는 립나 예레미야의 딸 “하무달”)를 잡아 하맛 땅 립나에 유배시켰다. 그 형제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여 18대 왕으로 세우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에서 죽었다.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에서 11년을(609-598) 통치했다(왕하 23:36).

감람원에서 바라본 현재 예루살렘,

애굽은 여호야김 4년(BC 605년)에 다시 갈그미스 전투를 참전했지만 패배했다. 그래서 여호야김은 3년을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애굽까지 진격했지만 실패했다.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권고를 무시하고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으로 선회했다(렘 27:1-15). 느부갓네살은 3년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정복했고 포로를 바벨론으로 이주시켰다(단 1:1-7, BC 603년). 여호야김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웠는데, 고작 3개월을 통치했다(왕하 24:6, 8).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어갔다(BC 597년 3월 10일, 2차 바벨론 유수). 그리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동생인 맛다니야가 시드기야(여호와의 선물)로 20대 왕이 되었다(왕하 24:17).

시드기야 9년(BC 588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을 반역하자 예루살렘을 공격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는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명령했다(렘 21:1-2).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것을 계시했고, 왕, 방백,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고했다(렘 21:3-10). 결국 예루살렘은 시드기야 왕 제 11년(BC 586년)에 함락되었다. 시드기야는 11년 동안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임한 여호와의 계시를 무시하고 반 바벨론 정책으로 결국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이 완전하게 파괴되었고(B.C 587, 3차 바벨론 유수) 처참한 모습으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간지 37년만에 정당한 생존권을 획득했다(왕하 25:27-30).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지 70년이 되면 다시 돌아올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 확증을 위해서 멸망당할 아나돗의 밭을 구입했다(렘 32장). ※ 1992년 종말론 사건에서는 승천할 사람들이 건물을 매입하기도 했다.

바벨론은 공중정원을 만들 정도로 찬란한 문명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 BC 539년 바사 왕 고레스(Cyrus, 페르시아 키루스 2세)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고레스 칙령(The Cyrus Cylinder, BC 538)은 세계 보편법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의 인권(Human Rights)을 성문화한 최초 법전이다. 1948년 UN 인권선언 이후로 모든 인권 사상은 고레스 법전에 근거한다. 성경은 고레스를 여호와께서 목자, 기름부음 받는 자이라고 했다(사 44:28, 45:1).

성경은 여호와께서 감동시킨 행동이지만, 고레스 법령에 의거해서 바벨론이 억류한 포로들을 석방시키는 정책을 진행했다(스 1:1, BC 538). 예레미야로 준 70년은, BC 586이 아닌, BC 605- BC 538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다의 멸망을 요아스의 죽음인 BC 609로 보아도 좋겠다.

1차 귀환에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로 모두 49,897명이 참여했다(스 2:1-64, 느 7:5-66). 1차 귀환은 고레스가 주도했는데, 당시 바사에는 다니엘이 있었다. 바벨론에서 바사의 관료로 다니엘은 활동했다.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지만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를 믿고 기다리는 다니엘의 활동을 생각해야 한다. 다니엘은 그토록 사모하는 예루살렘으로 자기는 가지 못하고, 민족을 돌려보내는 역할을 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바로 성전을 착공했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시작한 성전 공사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여호와께서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격려했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다리오 2년 6월 24일에 재개하여(스 5:1-2, 학 1:14-15, 슥 4:6-10), BC 516(다리오 6년), 약 4년 5개월에 완공시켰다(스 6:15). 이것은 성전이 파괴된 후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라는 2차 귀환에 참여했고(BC 458), 느헤미아는 3차 귀환을 주도했다(BC 445). 그 사이에 에스더(아하수에로 왕, Xerxes)이 있다. 다리오(다리우스)와 아하수에로(크레스크스)는 그리스와 세기의 격돌을 벌렸지만(페르시아-그리스 전쟁, 최초 동양과 서양의 전쟁, BC 499-450),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마라톤 전투(BC 492), 테르모필레 전투(BC 480), 살라미스 해전(BC 480)이다.

성경으로 보면 바사 왕의 대략은 고레스-다리오-아하수에로-아닥사스다로 이어진다. 다리오와 아하수에로가 페리시아-그리스 전쟁을 치뤘다. 아닥사스다는 아하수에로의 아들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귀환시켜 주어 성벽을 52일만에 완공시켰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총독의 임기를 다한 후에 바사로 귀환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내려왔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있는 훼방자들을 제거하고, 거룩을 위해서 레위인을 회복하고, 안식일 준수, 언어 정책, 유대인의 순수 민족의식을 형성(강제 이혼, 스 10:2)시켰다.

스룹바벨, 여호수아(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는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백성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도록 합당한 생활 구조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예루살렘 거민들은 초라한 성전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거룩한 율법을 반겨하지 않았다. 400년이 지난 뒤에 에돔 사람이 지은 황금성전을 좋아했고, 율법주의를 좋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자의 계시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믿고 기다리던 자들에게 주께서 응답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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