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성도를 위해 전생애를 드림

페북 공간에 일하는 목회자들(이하 ‘일목’) 그룹이 있다. 신상훈목사가 “비즈니스 선교 혹은 비즈니스 목회, 다른말로하면 이중직 목회, 이중직 선교의 필요성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많은 일목을 하시는 목사님들이 내린 정의가 삶의 고달픔과 사명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애쓰고 수고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이 전해졌다. 

일목 목회자들의 이중직 목회 혹은 이중직 선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먹고 살려고" "생존" "생계유지" "양심적 목회" "자립목회"

"뒷 배경없는 목회자의 몸부림" "생계형 목회자가 되지 않기 위한 실천"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진짜 목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말씀과 삶의 일치의 비전이 이중적으로 나가게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개척 20년 되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중직 목회자로 사례비 없이 직업을 통해 교회를 섬김"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목수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일목들의 정의는 아주 기발하고 창의적인 단어로 정의를 잘 내렸다. 현실과 비전 사이의 혼돈,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 고뇌와 교회 임대료를 감당해야하는 현실적인 거룩한 책임감, 현실적인 최저생계를 해결해야하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작은 교회앞에 놓인 요단강이며 홍해이며 골리앗이다.

작은 후미진 곳에서, 텅 빈 교회 예배당에서 생존과 사명 사이에 눈물을 훔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일목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주님도 그 분들과 함께 울고 계실 것이다.

신대원을 졸업한 그 해에 아내와 함께 구리 땅으로 왔다. 기존 교회 전담보다는 개척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개척의 길에 들어섰다. 개척에 대한 준비도 교육도 없이 무작정 시작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아내에게 ‘나를 전도사로 불러주는 성도 한 명만 있어도, 교회에 예배드리는 한 사람만 있어도 교회 문을 닫지 말자. 그리고 우리 힘으로 일해서 월세내고 우리 자녀들 공부시키자’라고 말했다. 아내는 적극적으로 동의를 해주었다. 교회를 개척한 후 약 3년간 아내는 주일날 다른 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섬겼다. 개척 초기에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개척하면서 비즈니스 목회, 이중직 목회 등에 대해 고민해본적이 없었다. 그것도 주님이 주신 은혜인 것 같다. 나는 교회개척이나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나 동일하게 보았다. 회사는 물건을 파는 것이고, 교회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역이다. 단지 물건이냐 사람이냐의 차이다. 나는 동일하게 보았다.

사업을 시작하면 모든 책임은 사업주에게 있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사업이 어려우니 무상으로 도와달라는 사람들은 없다. 모든 어려움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도 사업주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개척했으면 결국 담임목회자가 끝까지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시작했다. 그래서 개척목회를 하면서 고민을 별로 하지 않았다. 교회는 항상 1명 이상 있기에 교회 문을 닫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 과정 동안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어려움 앞에서 뒤로 도망치지 않았다. 나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최상의 구역이기 때문이다. 나를 구리 지역으로 보내주셨고, 함께 하는 성도들을 감당할 수는 최고의 카드이기에 주님이 구리시 사역의 장으로 보내주셨다고 생각했다.

자비량으로 개척 목회를 시작해서 벌써 19년 이란 세월을 보냈다. 15년 동안 자비량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쁨을 주셨다. 이 시간에 자녀들은 어느듯 대학을 다 졸업하였다. 뒤 돌아보면 잠깐인데, 그 길고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긴 밤 지새우며 새벽을 맞이했던 시간이 참으로 많다. 늘 변하지 않는 현실의 무게가 짓눌렀다. 그런데 참으로 현실의 무게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가 더 컸다. 그러기에 견딜 수 있었고 고난을 고난으로 느낄 수 없도록 도우셨다.

개척 자비량 목회를 통해서 발견한 가장 큰 기쁨은 문제들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주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이다. 문제를 극복하면 따스한 간증이 된다. 문제들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통과하고나면 영적인 힘이 쌓여갔다. 이것이 주님이 자비량 개척자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요 특권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선물을 위로 부터 받았다.  자비량개척목회는 자기 것을 다 내주고 내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부요함의 은혜를 체험하는 큰 복을 주신것이라본다.

요한계시록은 두 가지 성이 존재한다.  큰성 바벨론 과 거룩한성 예루살렘이다. 큰 성 바벨론은 온갖 사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온갖 탐욕과 욕심과 음란과 부정과 더러움의 집합소이다. 결국에는 큰 성 바벨론은 철저하게 무너져버린다.

그러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성이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이다. 모든 성도들이 들어가서 영원히 머무를 성이다.  

큰성 바벨론을 지향할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지향할것인가? 이것만 분명하면 우리는 자비량 개척목회의 어려움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무너지는 아우성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더욱 힘든 현장은 개척교회일 것이다. 개척교회의 열악한 경제적 현실과 인적 자본의 부실은 버티기 힘들 정도이다.

우리는 문제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현재와 개척해야할 미래이다. 이제는 ‘한 명’의 성도를 붙들고 씨름해야할 시대적 상황에 앞에 놓여 있다. 누가 한명의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전 인생을 드릴 것인가? 사명자들에게 놓인 질문이다. 큰 성 바벨론을 추구하는 사역자는 자비랑개척목회를 할 수 없다.  큰 성에 목말라하는 목회자는 함량 미달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추구할때 내적 충만함과 하늘의 영적 부요함으로 채워진다. 그러면 쓰러지지 않는다. 목회자의 영적 자존심을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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